통일시대 Vol 1722021.02

평화의 시간


2021년 한반도 평화의
시계(時計)와 시계(視界)



2020년 그 길고 험난했던 경자년이 지나갔다. 지난해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범세계적으로 덮쳐 일상생활이 깨지는 낯선 세상을 경험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제질서도 더욱 불 투명하고 불확실 해졌다. 세계 각국은 문을 닫아걸고 각자도생에 들어갔으며 보호무역주의가 성행하고 국제분업체계가 붕괴되었다. 협력과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두었던 국제관계도 불신과 혼돈으로 뒤덮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
혼돈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 재발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다. 코로나19는인간 세계에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성찰과 새로운 가치 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이미 대기 오염이 줄고 지구 환경이 개선되는 코로나19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 안보 개념보다는 환경·생태·자연재해·보건 위생 등 인간안보가 더 중시되고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이 절실해졌다.

  이 같은 국제질서의 변환기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우리의 위상과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K-문화 등 소프트파워가 좋은 평가를 받아온 데 이어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K-방역의 유용성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힘을 재발견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관건적 동력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가동을 멈추었다. 지난해에는 대화와 협력의계기가 마련되지 못했고, 북한의 도발행위까지 겹쳐 교착 국면이 지속되었다.

  북한은 지난해 초 당 중앙위 제7기 제5차 전원회의 결정서를 발표하고 ‘정면돌파전’을 시대적 과제로 내세워 대남·대미관계 개선의 길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전단살포 사건 이후 대남 적대적 태도를 취하면서 군사적 위협을 하는 수준으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급기야 통신연락선이 차단되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으며, 우리 국민이 서해상에서 피격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의 끈을 놓아버린 것은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총참모부가 올린 대남 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시켰으며, 우리 국민 피격 사망 사건에 대해서는 신속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해 상황 악화를 막았다. 당 창건 열병식에서는 “하루빨리 이 보건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며 남북관계 개선의 기대감을 비치기도 했다.

  북한은 지난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었다. 코로나19, 수해, 국제제재의 삼중고가 몰고 온 물자공급 부족과 시장 기능 마비로 경제사정이 악화일로에 빠졌고 경제발전 5개년 전략 실패를 자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2020년 한반도 평화의 시계는 우리의 성의 있는 노력에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 그러나 멈춰 선 것은 아니다. 동짓날은 밤이 가장 긴 날이지만 그때부터 해가 점점 길어지는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하다. 모든 일이 그렇듯 저점을 때리면 바로 상승으로 연결된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새롭게 발견한 우리의 힘과 자부심이 한반도 평화의 시계를 다시 돌릴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한반도 주인으로서 K-평화 실현해 나가야 할 때
   신축년을 맞아 새해 벽두부터 한반도 정세를 가름하는 새 판이 짜이고 있다. 1월 5~12일 북한이 제8차 당대회를 개최하였고, 1월 20일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신년사와 기자회견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선도국가 도약의 길을 밝혔다.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분열 현상을 극복하는 통합을 이루고 대외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복원하여 리더십을 되찾는 것이 국정 목표이다. 이에 따라 가치와 규범을 중시하고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대외정책을 기조로 삼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반적인 리뷰를 마치고 외교안보 진용을 갖추는 데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북핵 어젠다의 우선순위가 낮고, 미국 주류사회의 대북 비우호 분위기가 여전하며, 북한 인권에 대한 압박 강도가 높을 것이라는 점들은 대북정책에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바이든 대통령 진영 인사들의 발언을 추려보면 ‘전략적 인내’와 같은 방관적 태도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선 북핵 문제와 관련해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되, ‘핵능력을 축소하는 데 동의하는 조건’에서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추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실무진을 중심으로 한 보텀업(Bottom-up) 방식과 스몰딜(단계적으로 상호 행동을 교환하면서 축차적으로 해결)의 수용이라는 실용적 입장으로 나타날 것이다.

  문제는 비핵화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가 미·중 간 전략경쟁이라는 큰 틀에서 다루어질 가능성이다. 미·중 간 전략경쟁이 첨단기술과 군사, 이념 분야로 확대되고 한반도가 그 대결의 중심에 놓인다면 우리의 역할 공간은 협소해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북한이 실제 행동으로 핵능력 강화에 나선다면 한반도 정세가 격랑 속에 휩싸일 우려도 있다.

  북한은 제8차 당대회를 통해 그동안의 성과와 결함을 총화하고 앞으로의 투쟁노선과 전략전술적 방침을 정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북한의 대남·대미정책이다. 우리 측에 대해서는 남북 간 합의를 이행하라며 ‘북측의 요구에 화답하는 만큼, 남북 간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만큼 상대하겠다’고 밝히고, 미국에 대해서는 적대시정책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우리 측 태도 여하에 따라 남북관계가 3년 전과 같이 평화와 번영의 새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쌓여 온 좌절감과 초조함을 남북관계 차단과 북·미 협상 거부로 분출시켜 왔지만, 신뢰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출로를 막는 도발행위는 자제하면서 여건과 환경의 변화를 기다려 왔다. 이번 당대회에서도 관계 개선의 여지는 열어놓았지만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고 상대측의 태도 변화에 맡겨놓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반도 정세를 진단해 볼 때 우리가 놓인 상황이 녹록지는 않다. 하지만 이 땅에 공고한 평화를 정착시키고 민족 공동번영의 토대를 구축하는 일은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의 시대적 책무다. 우리는 북한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길에 동참케 해 K-평화를 실현하고 미·중 간 양자택일의 강요된 상황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난 1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남북관계 독자성 높이고 상황변화 선도해야
   우선 대북정책을 단순히 남북관계의 문제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글로벌 차원에서 우리의 위상과 역할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안전과 발전을 도모하는 국가발전전략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된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포기하거나 중단할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2021년 기회의 창을 힘 있게 두드려야 한다.

  미·중 간 체제 경쟁은 상수가 되겠지만 완전한 디커플링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에서 우리가 스스로 운신의 폭을 제약할 것이 아니다. 당당하게 국익에 기반을 둔 원칙으로 실용주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취할 다양한 방안을 구사한다면 도전을 기회로 바꿀 수 있다.

  또한 북한도 마냥 폐쇄와 군사적 긴장을 유지하는 데 매달릴 수는 없다. 이미 그들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자력갱생은 한계에 부딪쳐 있다. 김정은 총비서가 ‘더 이상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인민대중제일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남북협력 없이는 자력갱생과 자력번영의 길이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등으로 미국의 관심을 끌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동안의 성과마저 수포로 돌리고 적대정책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북한이 말하는 ‘적대정책 철회 대 북·미 대화 재개’가 적대정책 철회를 조건으로 한 대화여서는 안 된다. 북한이 해야 할 일은 먼저 미국의 적대정책 철회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목표를 적대정책 철회에 둘 것이 아니라 북·미관계 정상화에 둔다면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맬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로서도 남북 간에 합의한 사항은 과감하게 실행에 나서야 한다. 체제경쟁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쪽은 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고 북한의 움직임에 따라가며 대응책을 강구하는 것은 ‘주도’가 아니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 상호 존중과 민족 공동이익에 기반을 둔 다양한 구상들을 제시하고 북한이 선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번에 북한이 우리 측 제안들에 호응해오지 않았지만 과거에도 명분을 고려하거나 새로운 별도 요구가 필요할 시 그런 태도를 보인 사례가 많다. 우리 측이 명분을 살려주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대안을 꾸준히 제시하고 상시적으로 남북 실무대화를 가동할 필요가 있다. 우선 방역 협력과 재해 예방에 따르는 문제와 군통신선의 재가동 및 군사적 신뢰구축조치 문제, 그밖에 북한 측이 제기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연합군사훈련 문제도 필요시 남북군사공동위에서 협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1월 20일 바이든 정부가 출범했다. 동맹 존중을 강조한 만큼 소통과 협력으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과 유연성을 견인해 나가야한다. ⓒ연합

"한반도 정세를 진단해 볼 때 우리가 놓인 상황이 녹록지는 않다.
하지만 이 땅에 공고한 평화를 정착시키고 민족 공동번영의 토대를
구축하는 일은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의 시대적 책무다.
우리는 북한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길에 동참케 해 K-평화를 실현하고
미·중 간 양자택일의 강요된 상황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올 상반기가 남북관계와 비핵화 문제 해결의 중대한 고비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미국의 대북정책 리뷰 전이라도 남북관계의 독자성을 높이고 상황변화를 선도해 나가야 한다. 단절되어 있는 남북대화를 복원하고 남북 간의 합의를 이행해 나가는 한편, 북·미관계를 추동해 나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다져야 한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도 동맹 존중과 연대 강화를 강조한 만큼 적극적인 소통과 협력으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과 유연성을 견인해 나가야 한다.

  시계는 빨라도, 늦어도 안 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우리가 나서서 시계를 맞춰주고 시계(視界)를 넓혀놓아야 한다. 신축년은 한반도에 평화의 ‘봄날’이 지속되는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형기 전 통일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