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칼럼
문명표준과 한반도
  제8차 조선노동당 당대회 개막을 알린 1월 6일자 「노동신문」 기사에서 ‘부국강병 대업의 실현’이라는 구절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북한이 당대회에서 내세운 ‘부국강병’이라는 발전 목표는 21세기 문명표준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문득 서양세력의 진출 속에 진로를 고민하던 19세기 조선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선은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에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문명표준의
중심에 서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데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서양세력이 자신들의 기준을 수용하도록 강요하면서 서양문명에 대한 대응 방향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본이 서양의 문명을 표준으로 설정하면서 재빠르게 서구식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
조선은 뒤늦게 ‘자강(自强)’을 통해 서구식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구 문명표준 따라잡기에 뒤처지면서, 제국주의라는 근대의 어두운 면을 모방한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20세기 남북 분단의 상황 아래 남한은 한미동맹의 틀 속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문명표준을 따라가는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편승’ 전략의 결과 남한은 민주화와 인권, 번영의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반면, 북한은 ‘자주세력’ 대 ‘제국주의 세력’의 이분법적 대립구도 속에서
문명표준과 동떨어진 19세기적 ‘부국강병’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양의 도를 지키면서 서양의 문물을 일정 정도 받아들여 생존을 모색하려던 19세기 조선의 ‘동도서기’ 전략과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
  여전히 문명표준에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남북이 협력하여 문명표준을 만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없는 것일까?
미국의 주도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점차 특정 이슈 영역에서 우리와 같은 중견 국가들이 문명표준을 선도할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감염병 분야이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미국과 서방 선진국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 K-방역 체계를 갖추었다. 감염병 분야에서 일종의 문명표준을 선도한 것이다.
  K-방역 선례에서 보듯이 남북이 협력하여 문명의 표준을 선도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로 ‘평화’를 들 수 있다.
그동안 국가 중심의 전통안보 영역에서 미국이 문명표준을 주도하여 왔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상황이 크게 변하고 있다. 국가 중심의 전통안보뿐만 아니라 인간안보, 비전통 분야 안보의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는 추세에 있다.
전통안보, 인간안보와 비전통 분야의 안보를 아우르면서 평화를 형성하는 새로운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남북이 분단을 극복하면서 평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남북이 협력하여 비핵화, 재래식 전력의 군비통제 및 감축, 인간안보를 아우르는 ‘지속가능한 평화(Sustaining Peace)’를 형성해 간다면 평화 영역에서
표준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이 평화프로세스에 협력하여 함께 문명표준을 선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지혜를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김수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