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평화
건축, 평화를 짓다
평화의 희망과 의지를 짓다
  두 젊은이가 있었다. 같은 지역 출신인 이들은 11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넘어 친구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교류했다.
그들은 청년 시절부터 각자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나이가 더 많은 젊은이는 물려받은 집을 고치고 늘렸고, 또 다른 젊은이는 아예 자신의 설계로 새로운 집을 지었다.
신기하게도 이 두 젊은이가 각각의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나이는 25세로 같았다.
  그들이 집을 짓고 있는 동안 그들 나라에 큰 변화가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에게 나라가 생겼다. 그들이 살고 있던 식민지가 독립한 것이다.
이 두 사람 모두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중 나이가 많은 사람은 새로운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또 다른 사람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훗날 3대 대통령이 되었다. 독립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두 집의 공사는 계속되었다. 집을 짓는 과정과 나라를 세우는 과정은 서로 겹쳐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이야기다. 그들의 집은 각각 마운트 버넌과 몬티첼로라 불리며, 미국 역사의 중요한 기념물이 되었다.
특히 뛰어난 건축가이기도 했던 제퍼슨의 몬티첼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인간은 희망을 담고자 할 때 흔히 나무를 심는다. 특히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능 못지않게 사회적 역량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분야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건축가는 개인이면서도 한 시대와 사회를 응축시켜 놓은 것 같은 존재였다.
몬티첼로처럼 뛰어난 건축은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으로 탁월함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반도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 건축이 등장한 경우는 없었다.
  스포츠, 음악, 문학 등에서는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지만, 남북의 건축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앞날을 함께 이야기한 적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간 몇 차례 정상회담이 있었고 그때마다 대규모 사절단이 동행했지만,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잘 알려져 있다.
스피노자가 했다고도 하고 마르틴 루터가 했다고도 하는 이 말은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의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사과나무를 건축으로 바꾸면 어떨까.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채의 집을 짓기 시작하겠다.”
  어떤가, 문장의 의미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들어가는 일을 시작한다는 것,
그것만큼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을 살아내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워싱턴과 제퍼슨은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실패하면 독립은커녕 적군에 의해 짓던 집이 파괴되고 반역죄로 목숨이 날아갈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집 짓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넌 ⓒwikimedia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인 건축
  이 상황을 지금의 한반도로 가져와 보면 어떨까. 지금 우리의 과제는 한반도 평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이다.
그 과정에서는 물론 물리적 힘도 필요하겠지만 종합적 문명 역량이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건축은 그 역할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다.
건축은 태생적으로 문명적 행위이며, 희망의 선언이고, 개인의 재능 못지않게 사회적 역량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분야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건축가는 개인이면서도 한 시대와 사회를 응축시켜 놓은 것 같은 존재였다. 몬티첼로처럼 뛰어난 건축은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으로
탁월함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반도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 건축이 등장한 경우는 없었다. 스포츠, 음악, 문학 등에서는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지만, 남북의 건축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앞날을 함께 이야기한 적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간 몇 차례 정상회담이 있었고 그때마다 대규모 사절단이 동행했지만 이 과정에 건축가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건축이 그동안 기회를 갖지 못했던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조건이 더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토마스 제퍼슨의 몬티첼로 ⓒ황두진
  이런 관점으로 보면 지금 폐쇄되어 있는 개성공단이 그만큼 절실하게 다가온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이만큼 밀접하게 여러 분야에서 공통의 목표를 향해 협력한 적은 없었다.
그 과정에 참여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한반도 평화라는 역사적 과정에 동참한 통일 일꾼들이다.
언젠가 개성공단은 다시 열릴 것이다. 그때 우리는 보다 준비된 상태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이해야 한다.
건축을 평화의 도구로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제 공업의 개념도 급격히 바뀌고 있다. 고부가가치 친환경 공업은 주거 등 다른 도시 기능과의
공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이상 개성공단이 아니라 ‘신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생산과 주거, 문화가 공존하는 새로운 도시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게다가 개성은 대표적인 역사도시가 아닌가. 오래된 것이 새 것을 낳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건축이라는 희망의 나무를 잘 키운 사례로 더 이상 워싱턴이나 제퍼슨이 아닌, 21세기의 한반도 사람들이 이야기되기를 바란다.
황두진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