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722021.02

우리고장 평화 ROAD

근현대사의 질곡을 한눈에

전주 역사의 길



전주를 몇 차례 둘러보고 ‘맛과 문화’에 감탄하는 이들에게 슬쩍 권하는 코스가 있다.
<왕의 길, 민의 길>이라고 내 나름대로 이름 붙인 이 길은 완산칠봉 녹두관에서 시작해
초록바위, 오목대, 경기전, 남부시장과 풍남문을 돌아 최근 복원된 전라감영에 이르는 길이다.
자잘한 볼거리가 있는 한옥마을 골목과 맛집을 순례하는 것도 좋지만,
전주를 원경으로 떨어져 보면서 이곳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를 만나보는 것도 좋다

백년의 귀향
완산칠봉 녹두관, 초록바위
완산칠봉 투구봉에 자리 잡은 녹두관. 동학농민군 무명 지도자가 안식하고 있다.
  경기전, 풍남문을 보면 전주의 볼거리는 다 본 거 아니냐고들 한다. 그런 이의 손을 붙들고 먼저 올라가는 곳이 남부시장 건너 완산칠봉이다. 완산칠봉은 봄철 꽃대궐로 유명하지만 다른 계절에도 울창한 전나무와 삼나무 숲이 찾아오는 이를 차분하게 다독거려 준다. 완산도서관 바로 뒤쪽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가면 투구봉. 이곳의 ‘녹두관’에 가면 기이한 무덤을 만난다. 봉분도 없이 실내에 모신 이 무덤의 주인은 동학농민군 무명 지도자이다. 2019년 기해년 6월 1일, 동학농민군 무명 지도자의 안장은 124년 만의 장례였다.

몸은 백이십년 전에 흩어졌고 머리뼈만 남아 오셨다. 동학농민군들이 마지막으로 내몰린 전남 진도에서 1895년 일본군에 의해 처형돼 ‘수급’으로 보관된 이 머리뼈는 인종학 연구대상으로 삼고자 한 일본인에 의해 1906년 9월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다. 이 분은 저들의 문서에 ‘수괴’로 언급되었으니 장군으로 칭할 수 있겠으나, 1894년 갑오봉기 이후 여러 곳에서 스러지고 1895년 대둔산, 장흥, 진도 등에서 마지막 대치선을 지키다 참살당한 농민군 모두의 넋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겠다. ‘무명’으로 오신 뜻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백성의 삶을 구하고자 고향을 떠나 일어섰고 끝내는 고향 잃은 유민으로 스러졌기에 그 넋들에게는 천지가 다 고향일 것이나, 농민군이 큰 뜻을 세운 곳으로 돌아왔으니 백년 만의 귀향이라 불러도 좋겠다.

  무명 장수의 무덤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초록바위가 있다. 원래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명소로 전주 10경에 드는 이곳은 그 아래 시장에 드나드는 백성들의 눈과 입이 모이는 곳이었다. 싸전다리 남측 초록바위에서 1894년 12월 3일 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농민군 장수 김개남이 참수됐다. 초록바위는 이전에도 천주교인들이 많이 죽임을 당한 곳이다. 그 죽음들 위에서 우리 역사가 가쁘게 지나갔으니, 그 어느 곳보다 생명과 평화를 갈구하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왕의 길
오목대, 경기전, 풍남문
124년 만에 귀향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안장식이 열리고 있는 전주 풍남문
  완산칠봉 초록바위를 지나 한벽루까지 나가는 길은 천변을 따라 걷는 게 좋다. 꽃과 억새가 우거진 길을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여기가 도심 한복판이 맞나 놀라게 된다. 한벽루 뒤로 산허리를 타고 모여 앉은 자만재 벽화마을 맞은편 등성이가 오목대이다. 오목대는 1380년(고려 우왕 6년)에 이성계 장군이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승전가를 울리며 자축연을 벌인 곳이다. 조선창업의 의지를 내비쳤다고 해서 조선왕조의 기원쯤으로 언급되는 장소다. 오목대에서 직진하면 경기전, 풍남문, 그 아래 전라감영이 있고 왼편의 시장과 전주천 너머가 완산칠봉이다. 전주의 큰일들이 다 이 안에서 벌어졌다. 오목대에서 경기전 가는 5백 미터쯤이 한옥마을에서 가장 붐비는 거리인데, 여기를 왕의 길이라 부를 만하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은 한복을 차려입은 청춘들이 옛 건물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기 바쁘다.

우리 근현대사의 흔적이 담긴 전동성당
  경기전 건너 전동성당은 풍남문 성곽을 헌 돌들로 일부 자재를 삼았다는 일화가 말해주듯 조선 왕조의 쇠퇴와 일제 식민지로의 전락, 타율적 근대화와 서양문물의 도래를 극적 대비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민의 길
저잣거리의 삶 남부시장
전주의 명물 콩나물국밥
  남부시장은 전주를 오롯이 살다간 백성들의 시간이 응축된 곳이다. 조선시대에도 남문 밖 시장으로 존재했고 동학군의 전주 입성, 조선말의 풍경과 일제 병탄 뒤 전주의 부침을 다 지켜 본 호남 제일의 물류 집산 시장이었다. 전성기에는 전국의 쌀시세가 남부시장에서 결정되었을 정도로 번성했으나, 대형유통마트의 공세와 생활권역의 변화 등으로 침체되었다가 요즘은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과 전주를 찾는 이들이 겹쳐지면서 꽤 활기가 있는 편이다. 전주를 대표하는 원조 콩나물국밥집과 채소, 어물전, 옷가게, 야시장, 청년몰 등을 돌아보면 시간이 후딱 간다.

시민들의 집회가 종종 열리는 민의의 장 풍남문
  남부시장으로 들어서는 길, 풍남문 앞 광장은 세상일에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의 단골 집회 장소다. 지나는 길이라도 잠시귀 기울여보면 우리가 놓치고 사는 많은 일들의 진실을 만날 수 있다.

생명과 평화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문화도시
2020년 복원된 전라감영 ⓒ전주시청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내내 전라도·제주도 수부의 행정기관으로 56개 군현을 다스리는 곳이었으나, 일제 침탈 후 대부분이 훼손되었고 그 자리에 서양식 도청사가 들어서 있었다. 전쟁때 완전히 파괴된 것을 지난해 70년 만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는데,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과 사랑방이라 할 관풍각, 내아와 행랑 일부가 복원되었지만 아쉬움도 적지 않다. 이 터에 새겨진 역사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과 조선정부의 협약에 따라 전라감영 선화당에 집강소가 세워지면서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전범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말하는 거버넌스의 이른 실험이었다고 할 새로운 시대와 평화의 모색은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전주시가 개발한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 ⓒ전주시청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공세에 끝내 무너졌고 자주적 혁신의 길이 막히면서 조선은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이후 우리는 망국과 유랑, 남의 종살이, 총알받이 징용, 분단, 전쟁, 민족 간 대립을 거치면서 피눈물의 근현대 100년을 보냈다. 그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가 단지 고증에 따른 건축물의 복원에 그치고 말 수는 없을것이다. 서울 종로 옛 전옥서(조선시대 감옥) 앞에는 전봉준 장군이 돌아가신 지 123년 되는 날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런데 정작 그가 민중자치의 전범을 내보인 전라감영 집강소 자리나 전주성의 어느 길목에도 전봉준 장군을 비롯해 동학농민군 두령들, 농민군들의 군상 하나 없는 것은 너무나 큰 아쉬움이다. 왕과 민의 역사를 대등하게 두고, 전주를 아시아 근대사의 한 축을 뒤흔들었던 역사현장으로 제대로 들어 올릴 때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는 이름이 비로소 무게를 갖게 된다.

국제슬로시티인 전주시가 아날로그적 정서와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도록 설치한 느린 우체통
  완산칠봉의 녹두관과 초록바위, 전라감영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역사 복원사업은 이런 열망을 바탕으로 조금씩 전주의 문화지도를 바꾸어가고 있다. 전라감영에서 인증샷을 찍을 때,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마음에 담아서 꼭 눌러주시길. 전주는 맛과 멋뿐만 아니라 생명과 평화를 바라는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진정한 문화도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찰칵!


이재규 우석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