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782021.08

예술로 평화

21세기 마지막 냉전을 넘어
서울로 찾아온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에 관한 단상



한국에서의 학살(1951) ⓒ2021-Succession Pablo Picasso-SACK(Korea)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시회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지난 4월,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대뜸 “왜 빨갱이 피카소 전시회를 하냐”며 피카소 전시회 개최를 반대하는 전화였다. 심지어 사무실로 찾아와 한국전을 왜곡하는 이념색채가 짙은 그림을 그린 ‘공산당 피카소’의 서울 전시회 개최를 항의하는 노신사도 있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이 한국에 들어 오기까지 워낙 우여곡절이 많았던 터라 이런 항의들은 전시회를 주관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이런 부담 때문에 내부적으로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특별 보안 조치 필요성을 논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작품도 다른 피카소의 작품들처럼 특별 보안 조치 없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공개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우리 시민의 ‘문화 의식 수준’을 믿자는 결론이었다.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 ⓒ2021-Succession Pablo Picasso-SACK(Korea)

이념대결의 소재가 된 피카소의 반전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은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당시 게르니카 마을의 학살 사건을 듣고 그 울분을 그대로 캔버스에 토해낸 대작 <게르니카>,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참상을 그린 <시체구덩이>와 더불어 대표적인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념대결의 소재가 되어왔다. 1951년 「타임」지를 통해 <한국에서의 학살> 제작 소식을 접한 작가 김병기는 ‘피카소와의 결별’이라는 편지를 낭독하면서 피카소를 비난했다. 1961년에는 피카소라는 이름의 크레파스 상품명을 사용한 것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980년대까지 반입금지 예술품 목록에 올라 있었던 이 작품은 비단 한국에서만 논란이 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이 작품을 미군을 학살자로 만든 공산주의 진영의 프로파간다로 간주해 피카소의 입국을 금지하고 정보당국을 통해 피카소를 감시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1980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뉴욕 등에서 전시됐는데, 당시에도 「뉴욕타임즈」는 이 작품을 스탈린의 프로파간다로 비난했을 정도로 미국에서도 철저히 터부시된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미술잡지에 간간이 실렸다. 2000년대에는 인터넷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도 몇 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2021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비로소 전시되고 있다.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1937) ⓒ2021-Succession Pablo Picasso-SACK(Korea)

냉전의 잔재를 넘어 용서와 화합으로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와 논쟁이 있지만 미술 전공이 아닌 내게 이 작품은 알랭드 보통이 언급한 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 중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기억,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이 땅의 전쟁에 대한 기억 이야기다. 그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약자에 대한 슬픔의 기억, 분노의 기억, 공포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그 기억의 일부가 우리 사회에서 기형적으로 변형되어 ‘냉전’이라는 괴물로 여태껏 살아 있다. 나는 <한국에서의 학살>이 주는 이 ‘기억’의 이야기가 왜곡되지 않고 온전히 우리 사회에 전해지기를 바란다. 1980년대 <한국에서의 학살>이 미국에서 전시될 때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이 작품에 관한 논쟁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서의 학살>이 그저 ‘빨갱이 피카소의 작품’만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예술 작품’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냉전’이 양산한 혐오와 증오를 넘어서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우리 사회의 품위가 느껴져 서 행복하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긴 시간을 넘어 우리 앞에 설 수 있었듯이, 우리도 화해와 용서 그리고 화합으로 ‘냉전의 잔재’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시회가 열리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앞에 길게 서 있는 시민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나는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위대한 예술은 고귀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강미연 비채아트뮤지엄 이사,
한반도평화경제포럼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