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현장
평양 로케이션,
금기와 적대 너머 접경으로서의 북한
2017년 인문한국플러스 사업에 선정된 중앙대·한국외대 접경인문학연구단의 어젠다는 ‘접경(接境, Contact Zones)’이다. 일반적으로 접경은 국경지대(Borderlands)를 가리켜 왔지만, 연구단은 이를 ‘접촉지대’로 확장한다. 접경연구는 국경 같은 하드보더(Hard Border)만이 아니라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일상 속 소프트보더(Soft Border)까지 텍스트로 삼는다. 연구단이 제시하는 접경은 인간행위의 물리적 조건일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서로 경쟁하고 공명하는 사회적 무대이다.
평양 로케이션(Location), ‘접경’에 대한 남한의 제한적 시선을 지울 수 있을까?
단지 지리적 접경이었을 수도 있었을 법한데, 남한과 북한은 분단과 이념의 경계 이편과 저편으로 분리된 채 70년을 훌쩍 넘겼다. 그러다 보니 북한과의 접촉은 늘 분단이라는 금기, 이념이라는 적대와 연동된 것으로, 그리고 이 인식론적 틀 안에서 그 경계는 고정불변하는 것이자 규범적인 것으로 여기는 데 익숙해졌다. 지금은 탈냉전의 시대인 데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분단과 이념의 적대를 넘는 남북 사이의 접촉지대가 존재할 가능성을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들다. 북한, 그리고 경계에 관한 규범적 기억의 새로운 순간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2021년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10여 년 전 남한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김련희의 귀환투쟁을 기록한 <그림자꽃>이다. 탈북 과정에서 여권을 빼앗기고, 남한에서도 여권을 압류당한 그녀의 무국적 인생 10년을 영화는 가만히 추적한다. 여권의 부재란 국제사회에서 자기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잘 도착했든 그렇지 않든 어떤 경계 안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15년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획하면서 이승준 감독이 기대한 엔딩신은 평양에 있는 김련희였다. 그러나 개봉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광화문 인근을 배회하는 김련희의 뒷모습과 2015년 북한에 있는 딸과 귀환 시기를 가늠하는 통화음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해 영화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보면, 그녀는 아직 평양에 있지 않다.
2021년 10월 27일 개봉한 <그림자꽃>의 포스터
그런데 이 영화는 정작 김련희가 금기와 적대의 경계에 갇혀 북으로 가지 못 하는 상황에서 ‘평양 로케이션’을 감행한다. 영화는 평양 김책공업종합대학 의사로 일하고 있는 남편과 고등교육을 받는 딸의 일상을 근거리에서 포착한다. 이 장면은 남한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내에게 부치는 영상편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평양 어느 가족의 일상을 기록하는 하나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된다. 이 신은 감독의 부탁으로 핀란드 영화인 미카 마틸라(Mika Mattila)가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해 촬영했다.
이 장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카메라 앞에 선 평양시민들의 자연스러운 표정과 행동이다. 카메라가 나타나면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숨기기에 바쁜 남한과 비교해 ‘극장국가’ 북한의 일상성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이러한 방식의 접촉이 표상하는 어떤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남한에서 평양시민과 공민임을 여러 차례 주장하지만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김련희, 그리고 2018년 4월 남북 정상의 ‘판문점선언’에 담긴 정전협정의 공소시효, 이런 평화체제로 인해 평양을 자유롭게 방문하는 외국인들로부터 소외된 남한의 결핍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상상력과 연동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을 여전히 타자화할 것인가? 세계로 불러들일 것인가?
2018년 국내에서 개봉한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호주의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안나 브로이노브스키(Anna Broinowski)가 평양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안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드니 전역이 다국적 기업의 층간가스 시추장이 되어가는 상황에 저항하고자 북한의 프로파간다(선전) 영화를 배워 영화를 만들 요량으로 평양 로케이션을 감행한다. ‘상상초월 혁명적 코믹 어드벤처’라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다소 코믹스러운 설정이지만 이런 기획 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가 시사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원제인 ‘Aim High in Creation’은 김정일의 『영화예술론』 영문 번역서 한 장의 제목이다. 이 제목은 북한의 고립과 폐쇄, 북한을 타자화하는 외부의 시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북한의 영화예술을 세계 내 존재로 호명한다. 북한의 위치를 바깥이 아닌 안으로 조정하는 순간 나눌 말이 많아진다. 이 영화는 정말 수다스럽다. 그리고 이 대화들은 북한을 단수가 아닌 복수로, 다자적이고 다중적인 접경(Contact Zones)으로 보이게 한다.
2018년 9월 개봉한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포스터
이렇게 북한을 접경으로 보는 것은 그간 분단과 이념이 빚어 온 금기와 적대를 넘어설 다양한 노드(node, 접점)를 발견하고 구축하는 여정의 시작이다. 영화가 쉽게 다른 세계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듯, 이 평양 로케이션은 남북 사이의 다른 대화와 접촉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다시 <그림자꽃>으로 돌아가, 김련희를 옭아맨 「국가보안법」과 레드 콤플렉스를 지우고 그녀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일상. 이 영화의 평양 로케이션은 여기에서부터 시작이다.
전 우 형
중앙대학교 접경인문학연구단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