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백도웅 민주평통 이북5도 부의장 “우리의 소원은 고향땅 밟기입니다”

“봉숭아꽃은 하얀색 꽃, 보라색 꽃, 또는 잎사귀를 따서 손톱에 물을 들여도 항상 빨간색으로 물듭니다. 색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속에는 모두 붉은 열정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민족의 마음 역시 봉숭아꽃의 빛깔과 같습니다. 고향과 사는 곳은 달라도 평화통일의 염원은 모두 같기 때문입니다”

백도웅 이북5도 부의장은 제19기 민주평통 출범을 ‘봉숭아꽃’에 비유하면서 실향민의 한을 위로하는 것과 미래세대를 위한 평화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평안북도가 고향인 실향민으로 또 종교계 원로로 오랜 세월 남북교류와 평화 활동을 위해 힘써온 백도웅 부의장. 그가 말하는 평화통일의 길을 들어봤다.

실향민과 실향민 2·3세가 주축이 된 이북5도지역회의는 그 누구보다 민주평통 활동에 거는 기대가 크다. 어느날 갑자기 가족과 고향을 떠나와야 했던 실향민들은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맨몸으로 버텨야 했다. 이제 일가를 일구고 가족도 생겼지만 부모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한으로 남아 있다.

실향민들은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실감하고 고향을 떠나온 만큼 평화통일에 대한 열망도 크고, 북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경우도 많다. 이러한 분들과 평화통일 활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백도웅 부의장은 2007년에 이북5도 평안북도지사로 임명됐을 때를 회고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 평안북도지사로 갔을 때는 진보성향 목사가 왔다며 비판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도 종교인으로서 한 3년을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묵묵히 활동하니 나중에는 그분들도 인정을 해 주셨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민주평통 부의장으로 다시 그분들을 뵈었는데, 이제는 다들 편안해 하시고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어요.”

실제로 이북5도지역회의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실향민 10명 중 6명이 사망하여 2세대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19기 출범에 맞춰 여성과 청년의 비율이 높아지는 등 구성의 변화도 있었다. 19기부터는 이북5도지사가 추천한 자문위원의 경우 각 지역이 아닌 이북5도지역회의에 소속되어 활동하게 됐다.

“이북5도지역회의는 지역 기반이 없으니 활동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이번에 바뀐 제도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그래도 실향민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좋습니다. 우리 지역회의의 특성을 살린 사업들을 발굴하고 추진하면서 그에 맞는 역할을 찾아나가고자 합니다.”

백도웅 부의장은 이북5도지역회의 활동방향을 실향민의 한을 푸는 일과 평화교육에 초점을 맞췄다. 자신도 평안북도가 고향인 실향민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염원이 누구보다 큰 백 부의장은 3살에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는 자신과 같은 실향민들은 “통일의 DNA가 가장 많은 세대”라고 지칭하며 실향민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실향민의 한은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는 슬픔이었다.

“우리는 이제 와서 고향에 가서 살라고 해도 못 살아요. 단지 고향의 땅을 다시 한 번 밟게 해주는 것. 그게 소원입니다.”

실향민의 소원, 고향땅 밟기

“우리는 이제 와서 고향에 가서 살라고 해도 못 살아요. 단지 고향의 땅을 다시 한 번 밟게 해주는 것. 그게 소원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북한에 방문할 수 있잖아요. 하다못해 이북5도 도민증이라도 만들어 주고 고향을 가고 싶어 하는 분들부터 관광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백 부의장은 이어 지금 당장 남북을 통한 직접 관광이 어려운 만큼 중국을 통해서라도 가능한 수준부터 조금씩 해나가면 좋겠다는 제안도 덧붙였다. 1981년 군옥지구에 세워진 평안북도 망향비에는 “북녘의 산하에 두고 온 조상과 부모형제와 처자 여기 ‘효’를 버리고 ‘의’를 등진 패륜의 아들들이 한을 안은 채 속죄의 눈물을 뿌린다”는 글이 새겨졌다. 효를 버리고 의를 등질 수밖에 없었던 실향민들은 이제 공통의 아픔을 가지고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역사는 앞으로 정직하게 흐른다

1988년 2월 29일 연동교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제37차 총회가 열렸다. 이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을 선포하고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선언문의 핵심은 1972년 발표된 7·4공동선언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원칙에 민간참여와 인도주의를 덧붙인 것이다. 한반도 통일문제는 정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 만큼 민간도 통일 운동에 참여해야 하며 이는 인도주의 원칙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백도웅 부의장은 이때부터 남북 종교교류와 평화 화해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95년 식량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의 상황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시작됐고, KNCC는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파트너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창구가 됐다. 이때의 인연이 이어져 그동안 백도웅 부의장은 몇 차례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처음 북한을 갈 때 인천에서 출발해서 30시간 만에 남포에 갔어요. 남포까지 가면 당연히 잘 교섭해서 고향까지도 가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뿐입니다. 태풍이 와서 배가 더 이상 정박하지 못한다고 36시간 만에 돌아와야 했어요.”

그 다음해 2월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해 8시간 만에 북한 강원도 고성항에 도착해 금강산을 방문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대북지원차 평양에 갔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리는 줄었지만 여전히 고향으로 가는 길 만은 멀었다.

그러나 백도웅 부의장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무화과 열매가 하루아침에 열리지 않듯이 위대한 것은 한 순간에 창조되지 않는다. 무화과 열매를 원한다면 먼저 꽃이 피기를 기다려라’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의 말을 인용하며 백 부의장은 ‘순리’라는 말을 했다. 무화과 열매가 맺기를 기다리듯 통일문제는 자연의 순리처럼 때가 되면 언젠간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보였다.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는 ‘역사를 짧게 비극적으로 보지 말고 길게 낙관적으로만 본다면 역사는 결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정직하게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갈등이 얼마나 심해요.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살아보니 대한민국에 위기가 없을 때가 없 었어요. 이건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계속해서 겪게 될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다려야 합니다. 평화로운 삶을 갈망하면서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평화로운 삶을 갈망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백도웅 부의장은 그 해답을 평화교육에서 찾았다.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만난 세쌍둥이는 그에게 충격과 함께 평화교육에 대한 확신을 가져왔다.

“평양의 산원에 갔는데 아이들 이름을 물어보니 김총, 김폭, 김탄이랍니다. 유명한 탤런트 송일국씨의 아이들 이름은 대한, 민국, 만세에요. 총폭탄과 대한민국만세.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나중에 통일이 됐을 때 이 아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같이 살아야 합니다. 미국에 사는 제 손녀는 인종이 어떻든 지역이 어디든 상관하지 않고 잘 어우러져 지내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워요.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평화교육이 필요합니다.”

총·폭·탄과대한·민국·만세…
평화교육으로 미래 세대 키워야

실향민으로서 종교인으로서 평화에 대한 그의 의지는 이제 미래세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백도웅 부의장은 현재 버켄장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자립을 위해 재산을 기탁하고 미국 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은퇴한 매들린 버켄 여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워진 버켄장학회를 통해 두 명의 북한이탈주민 청소년이 자신의 꿈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백도웅 부의장이 북한이탈주민 청소년에게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비단 그가 실향민이어서 뿐만이 아니다. 같은 남한 사람끼리도 지역과 빈부격차 등으로 인한 갈등과 편견이 심한 사회에서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살아가야 할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백도웅 부의장이 통일을 염원하며 가슴에 품고 다니는 20년 전 신문 광고

버켄장학회가 지원하고 있는 허○○ 양과 이○○ 양은 백 부의장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잘 보여주는 모델이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9살에 두 살 어린 동생과 남한으로 온 이 양은 버켄장학회의 도움으로 국제베일러학교에 다니게 됐다. 화가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이 양은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고, 미국에서 열린 Scholastic Art & Writing Awards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허 양의 부모는 평안북도에서 딸의 미래를 위해 남한행을 결정했다. 북한에서도 성적이 좋아 줄곧 주목받았지만 그곳에서 꿈을 펼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허 양도 버켄장학회의 도움으로 남한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살아가게 될 남한 사회는 편견과 갈등이 사라진, 평화로운 한반도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백도웅 부의장은 평화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언젠가는 북한에도 ‘평화’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자신의 꿈을 펼치며 자랄 수 있는 시대를 꿈꾸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평화통일에 대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색이 바랜 신문 광고 두 개를 꺼냈다. 북한 1호점을 오픈한다는 주유소 광고와 북한군이 남한의 소주를 들고 있는 광고였다. 금강산 관광이 이제 막 시작된 1998년 즈음 남북교류가 시작되면서 남과 북의 사이가 좋았을 때 제작된 광고였다. 통일이 되기를 바라며 가슴에 품고 다닌다는 신문 광고를 보여주며 백도웅 부의장은 “조급해하지 말자”고 말했다.

“지난 정부에서는 ‘통일은 대박’이라고 해서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았습니다. 2년 전 남북이 서로 만났을 때도 금방 통일이 될 것 같았지만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나 모든 일에는 항상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역사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20년도 더 넘은 신문 광고는 어제 오려낸 것처럼 깨끗했다. “조급해하지 말자”는 메시지는 현재의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는 조언이기도 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봉숭아꽃처럼 남과 북의 역사도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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