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립대학과 같은 역할을 했던 서원은 지역의 교육과 문화 여론의 구심점이자 지성의 요람, 성리학 발전의 중심지였다. 시간이 흐르며 수가 급격히 불어나 온갖 비리와 부패의 온상이 되는 폐단도 나타났지만 서원의 정신과 가치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약 670여 곳의 서원 중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모두 9곳(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장성 필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 그중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을 찾았다.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다
이른 아침, 제법 쌀쌀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영주로 향한다. 영주터미널에서 소수서원까지 가는 길에는 붉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과 노란 황금빛 들녘이 펼쳐져 있다. 저물어가는 한해를 풍성하게 만드는 색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소수서원을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는지 이른 시간에도 벌써부터 서원 앞에는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조선 중종 37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회헌 안향의 위패를 봉안하고, 학사를 건립해 ‘백운동 서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백운동 서원이 세워진 곳은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인데, 아직도 입구에는 절이 있었음을 알리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소수서원 강학당 내부
소수서원 강학당
명종어필 소수서원현판 ⓒ소수서원박물관
공민왕의 글씨로 전해지는 무량수전 현판
서원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으로서도 가치가 높다.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는 것을 인격수양의 길로 생각했던 선비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길을 고민했다.
이에 주세붕은 이곳에 서원을 짓고 “중국 송나라 때 주희의 백록동 서원이 있던 여산 못지않게 구름과 산, 언덕, 강물, 하얀 구름이 골짜기에 가득하다”며 백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경치 가 빼어나다. 서원 바로 옆에는 소백산에서부터 흘러오는 죽계천이 흐르고, 그 옆으로 오솔길이, 서원 주변에는 수백 년 된 적송이 둘러 있어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맑은 풍경 속에 어지러운 심신을 정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원 입구까지 가는 길에는 죽계천 건너로 작은 정자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취한대와 경자바위다. 퇴계 이황이 지었다는 취한대는 공부하다 지친 유생들이 잠시 휴식을 하던 곳이다. 근처 경자바위는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뜻의 ‘경(敬)’자를 주세붕이 새겨 넣은 것인데, 당시 유생들은 서원에 들어서며 이 경자바위를 보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명종 5년(1550)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주세붕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원의 기반 강화에 힘썼다. 이황은 서원을 진흥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조정에 사액을 바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명종은 서원의 이름을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다(旣廢之學紹而修之)’라는 뜻의 ‘소수’로 짓게 한 후 친필로 적은 편액과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했다.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의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리는 것을 ‘사액’이라고 하는데,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기도 하다.
서원은 학문을 배우던 강학영역과 제를 지내던 제향영역으로 나뉜다. 정문을 지나면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강학당(명륜당)이 제일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강학당에는 명종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진품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강학당 뒤로 나란히 서 있는 건물들은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상징한다고 한다. 가장 먼저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 그 옆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신재’, 깨어서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가 있다.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수서원에서 배출된 인재는 무려 4,000여 명. 서원을 통해 학문을 다시 잇겠다는 선현의 의지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견고해졌다.
강학당 왼편으로는 문성공묘와 전사청, 영정각 등 제향영역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제향을 올리고 있다.
소수서원 이후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립되던 서원은 시간이 흐르며 전라, 충청을 넘어 한강 이북지역까지 퍼져나갔다. 가볼 수는 없지만 북한에도 서원이 남아 있는데, 정몽주의 집터에 지어졌다는 개성 숭양서원, 율곡 이이의 위패가 모셔진 황해도 소현서원, 평양 용곡서원, 함경남도 노덕서원 등이다. 소수서원에서 시작된 유교의 명맥이 북한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만나게 되는 극락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나와 죽계천을 가로지르는 백운교를 건너면 소수박물관과 선비촌으로 길이 이어진다. 선비촌에는 옛날 선비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가옥이 조성되어 있는데, 예절과 전통공예를 배우고, 한옥체험도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소박하지만 굳은 신념과 지조를 지키며 살았던 선비들의 삶을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소수서원에서 차를 타고 조금만 더 가면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유네스코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는데, 여기에 영주 부석사, 양산 통도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등 7곳의 사찰이 포함됐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지었다는 부석사는 1300년이 넘은 고찰로,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량수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후삼국시대에는 궁예가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내리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의상대사를 흠모해 목숨을 바친 당나라 여인 선묘의 이야기는 부석사 창건설화로, 무량수전 뒤편의 부석과 선묘각으로 이어진다. 무량수전과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 석등과 석탑 등 국보와 보물을 다수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부석사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은행나무 길을 10분 정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가파른 계단이 앞을 가로 막는다. 신라시대 때부터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대석단 에 오르는 길이다. 계단을 올라 쭉 따라가면 마침내 안양 문과 안양루에 이른다. 안양(安養)은 불교에서 극락을 이르는 다른 이름으로, 저 아래에서부터 몸을 숙이고 가파른 계단을 쉴 새 없이 올라온 이에게 이 너머는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극락인 셈이다. 안양문을 지나야 비로소 그 유명한 무량수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 하면 무량수전이 저절로 떠오르지만, 부석사의 진미는 무엇보다 이곳까지 올라온 후에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발 아래 펼쳐진 소백산 줄기와 광활한 하늘은 마치 하늘과 땅의 경계에 선 기분이 들게 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앉아 문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근심과 걱정이 모두 사라진다.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저마다의 소망과 기원을 풀어냈을까. 마음속 짐을 내려놓고 극락을 빠져나와 다시 일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