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742021.04

국제


미얀마 민주주의 회복 위해
국제사회의 ‘건설적 제재’가 필요하다



2015년 군부독재에서 벗어나 문민정부를 세웠던 미얀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미얀마 사태의 과정을 톺아보며 이것이 국제정치에 주는 함의를 살펴본다.



지난 2월 7일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규탄 시위대가 독재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

   미얀마가 다시 위기에 놓였다. 아웅산 수 찌(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이하 NLD) 문민정부가 집권 2기에 진입하기 직전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 군총사령관이 이끄는 군부에 의해 붕괴된 것이다. 이로써 NLD-군부 간의 불안정한 동거, 즉 이중권력체제를 기반으로 한 ‘질서 있는 이행(orderly transition)’이 종언을 고했다.

   이때의 ‘질서 있는 이행’은 헌법적 보장 하에서 군부가 부분적 퇴각을 결정했던 ‘협약에 의한 민주화(pacted democratization)’를 의미한다. 협약의 결정적 계기는 2011년 8월 19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떼인 쎄인(Thein Sein)과 NLD 지도자 아웅산 수 찌의 네피도(미얀마의 수도) 회동이었다. 결과적으로 협약의 핵심은 NLD가 군부의 지속적 정치개입을 보장한 2008년 헌법을 수용하는 대신 군부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따른 정치적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 아웅 흘라잉 군부세력은 쿠데타를 통해 지난 2020년 11월 총선 결과를 부정함으로써 이 협약을 뒤엎었다. 지난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298명이 쿠데타 직후 긴급 결의로 구성한 연방의회대표위원회(이하 CRPH)는 쿠데타 군부세력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규정하고 국제사회를 향해 이들을 인정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30년 전의 ‘위기’를 떠올리는 미얀마의 현재
  현재의 위기는 1988~1990년의 미얀마의 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1987년 군정 하에 있던 미얀마는 2~3,000만 달러밖에 안 되는 외환보유고에 비해 외채는 35억 달러에 이르렀다. 미얀마가 경제적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것이다. 군사정부는 UN에 최우선적으로 원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최빈국(LLDC)으로 분류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해 12월 UN은 이를 승인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국민들은 분노했다. 1962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26년간 폭정을 일삼은 최고지도자 네 윈(Ne Win)은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분노는 진정되기는커녕 계속 확산되어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민중항쟁’으로 폭발하였다.

  1988년 9월 국방장관이자 군총사령관이었던 소 마웅(Saw Maung)이 ‘위기관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에 저항하는 2,0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학살한 가운데 군사평의회에 해당하는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가 출범했다. 소 마웅 군부세력은 사회주의 폐쇄경제로부터의 탈피를 선언하고 외국인투자법을 제정했다. 이듬해 1989년에는 국명을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서 ‘미얀마연방’으로 바꾸었다.

  1990년 5월 아웅산 수 찌가 가택연금되고 계엄령으로 인해 4인 이상의 옥외집회가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30년 만에 총선이 치러졌다. 군부는 그들이 후원하는 정당의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아웅 산 수 찌가 이끄는 NLD가 전체 485개 의석 가운데 392석을 획득한 것이다. 압승이었다. 반면 친군부 정당국가통합당(NUP)은 10석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NLD는 신헌법 제정을 위해 조속히 권력을 넘겨줄 것을 군부 측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아웅산 수 찌를 가택연금 상태에서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NLD 지도부 체포에 나섰다. 군부가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폭압적인 거부 쿠데타(veto coup)로 맞선 것이다. 이때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학생, 지식인, 정치인들의 미얀마 탈출이 시작되었다. 8888 민중항쟁의 주역이었던 학생들 중 투옥을 피할 수 있었던 이들은 도시를 빠져나가 무장투쟁을 시작하거나 제3국을 찾았다.

  미얀마 군부 ‘땃마도(Tatmadaw)’에게는 그들의 특권유지를 위한 세 개의 주요 방어선이 있다. 1차 방어선은 군병력과 친군부정당, 2차 방어선은 군부기업과 그 이해당사자들, 마지막 3차 방어선은 군이 직접 초안을 작성해서 통과시킨 2008년 헌법이다. 이들 방어선은 군부가 관리하는 민주주의, 즉 ‘규율민주주의(disciplined democracy)’와 지배계급이자 특권집단으로서의 군부를 지켜내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이를테면 현행 헌법은 의회 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고 내무부, 국방부, 국경수비부 장관직을 현역 고위급 장교가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또 헌법 11장 417조는 국가비상사태에서 군총사령관이 정치권력을 접수하도록 함으로써 ‘합법적 쿠데타’의 길을 열어놓았다.

지난 3월 12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를 규탄하는 시위대가 유엔에 ‘보호 책임(R2P)’을 촉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

군부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운동
  2016년 3월 아웅산 수 찌의 NLD 정부가 출범했을 당시 내걸었던 3대 개혁과제는 헌법 개정, 소수민족과의 화해, 경제부흥이었다. 특히 NLD 문민정부는 군부의 특권을 명문화한 헌법을 개정하는 데 주력했다.

  아웅산 수 찌 정부가 군부로 하여금 헌법 개정을 수용하도록 하는 방도로 중국의 압력을 고려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중국은 유엔안보리가 무슬림 소수종족 로힝야에 대한 학살행위를 미얀마군과 정부 당국이 책임지도록 하는 결정적 조치를 막아주었다. 일각에서는 이를 신장 위구르족과 여타 중국 내 인권 문제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피하려는 중국의 이해관계와 연관지었다. 하지만 이는 무엇보다 미얀마군 장성들로부터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6년 NLD 문민정부 1기가 출범했을 당시 아웅산 수 찌 국가고문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중국이었다. 로힝야 인권 문제로 서방과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수 찌는 친중국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수 찌의 행보를 두고 중국의 주력사업인 일대일로(BRI)에 호응하면서 중국을 이용해 미얀마군이 정계에서 점차 퇴각하도록 유도하려 한다는 일종의 ‘위험한 거래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지난 2월 1일 쿠데타 직후 중국의 애매한 태도, 특히 미얀마 군부 규탄과 관련하여 중국이 유엔안보리에서 보인 소극적 태도는 미얀마 국내에 반중정서를 확산시키고, 쿠데타 배후에 중국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게 하였다.

  이번 쿠데타로 민 아웅 흘라잉 군총사령관이 1988년 민중항쟁을 유혈진압하고 1990년 총선 결과를 뒤엎어 ‘파괴적 안정시기’를 구축했던 과거를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명백한 오판이다. 지난 10년 개방 시기를 거치면서 미얀마 국민들의 시민의식은 한층 더 높아졌다. 군은 이러한 불가역적 상황을 억지로 돌리려는 무모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 군부로선 예견하지 못했을 시민불복종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 이하 CDM)이 전국단위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군부 기업이 생산하는 물품에 대한 불매운동, 해킹을 통한군부기업 관련자료 공개, 친군부 인사들과 쿠데타 주도세력 일가족에 대해 수치심 주기 등 사회적 처벌(social punishment)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미 미얀마 국민들은 1974년, 1988년, 2007년 세번에 걸쳐 억압적 군부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운동의 역사를 쓴 바 있다. 이번 시민불복종운동은 종족과 지역, 그리고 세대의 차이를 넘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미얀마 국민들의 희생을 각오한 저항권 행사는 부정선거를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어떠한 도덕적·법적 정당성도 없음을 보여준다. 2008년 미얀마를 강타한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인한 국가재난 상황에서 스스로 만든 헌법을 무리하게 통과시키고, 2010년 총선도 NLD의 불참 하에 불공정하게 치루어 친군부정당인 연방단결발전당(USDP)을 집권당으로 만든 미얀마군부가 부정선거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미얀마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한편 NLD가 주도하는 CRPH는 범국가휴전협정(NCA)에 조인한 무장반군들과의 연대를 선언했다. 또 2008년 헌법을 대신할 연방헌법, 연방민주주의에 관한 구상을 하고 있다. 연방군이 조직될 가능성도 있다. 군부의 유혈진압이 계속될 경우 비폭력 투쟁인 시민불복종운동(CDM)에서 시민방위대(CDF)가 분화될 가능성도 있다. CRPH는 군부에 의해 불법화되었기에 거점은 없지만 매우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CRPH는 ‘보이지 않는 호랑이(invisible tiger)’다.

  여기에서 미얀마가 1962년 군부의 폭정이 시작된 이래, 미얀마 군부 땃마도에 맞서는 소수민족 반군들의 무장투쟁이 지속되는 내전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반군들은 쿠데타 직후 쿠데타 반대와 시민불복종운동 지지를 선언했다. 국제사회는 미얀마가 새로운 양상의 내전상태로 빠져들 수 있음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특히 미얀마의 최대 경제협력국인 중국은 자신들이 근시안적인 실리 외교를 지속할 경우 오히려 엄청난 경제적, 외교적 손실을 불러올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반면 미국,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은 2011년 정치개방이 시작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군부 폭정 하의 미얀마에 대한 제재를 단행한 바 있다. 무기 거래 중단, 군 출신 외교관 추방, 군 고위급 간부 비자 발급 불허, 인도적 구호를 제외한 일체의 쌍무 원조 중단 등을 실행했다. 특히 미국은 군부 통치 하의 미얀마를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했다. 반면 내정불간섭을 규범으로 삼고 있는 아세안(ASEAN)은 ‘건설적 관여(constructive engagement)’, 즉 일종의 ‘포용을 통한 변화’ 노선을 채택하고, 서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7년 미얀마를 아세안에 가입시켰다. 그렇지만 이듬해 수린 핏수완(Surin Pitsuwan) 태국 외무장관이 아세안 장관 회의에서 제안한 ‘유연한 관여(flexible engagement)’는 그동안의 내정불간섭 규범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쟁점이 되었다. ‘유연한 관여’의 핵심은 아세안 내 회원국의 국내정책이 다른 회원국들에게 부정적 여파를 미칠 경우 이를 공개적으로 집담회에 부치자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국경 없는 민주주의 보여줘야
  문재인 정부는 아세안과 ‘사람 중심의 평화번영 공동체 구축’을 선언한 바 있다. 이번 기회에 한국 정부는 과거 군부의 폭정 하에 있던 미얀마를 향해 취했던 ‘NATO(No Action Talk Only)’ 외교에서 탈피해야 한다. 쩌모툰(Kyaw Moe Tun) 미얀마 유엔대사는 유엔 총회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세 손가락을 펴들고, 군부와 맞서고 있는 CRPH만이 정당성이 있음을 호소했다. 그는 군부에 의해 곧바로 해임되었다. 이제 아세안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뒤엎고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미얀마 군부에 대해 ‘건설적 제재(constructive sanction)’로 강력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아세안 사무총장이 되기 전 수린 전 태국 외무장관이 제안한 바 있는 ‘유연한 관여’가 필요할 때이다. 특히 아세안과 전략적 협력관계에 있는 한국이 ‘건설적 제재’에 앞장섬으로써 민주주의를 나누는 데 국경이 없음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국제사회가 나서서 미얀마가 ‘폭정의 전초기지’로 회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박은홍 성공회대학교
정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