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기획
미래가 온다 ⑦
포스트 코로나,
과학기술 중심시대가 온다
코로나19는 초고속 백신 개발을 이뤄내며 인류가 가진 과학기술의 힘을 드러냈다.
과학기술분야에서 ‘재빠른 추격국’인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한 과제를 제안한다.
* 본 기획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협력하여 코로나19가 가져온 한국사회의 과제를 미래비전 차원에서 짚어봅니다.
  박쥐로부터 유래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킨 코로나19 팬데믹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깨닫게 했지만, 동시에 인류가 가진 과학기술의 힘이 만만치 않음을 드러냈다. 스페인 독감과 같은 이전의 팬데믹들과 비교해 더 밀집된 도시들, 그리고 그 도시들을 빈틈없이 또 쉴 새 없이 오가는 항공편들은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를 높이고 범위를 넓혔다. 막심한 인명 피해가 있었지만, 글로벌 팬데믹이 발생한 지 만 1년이 되지 않아 여러 종류의 백신이 개발되었고, 만 2년이 되지 않아 팬데믹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이전까지 개념만 알려지고 개발에 속도를 내지 못했던 mRNA 백신과 합성항원 백신이라는 신기술이 초고속으로 완성되었고 사용이 특례적으로 승인되었다. 말하자면 과학기술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시 비상체제가 가동된 것이다.
  코로나19 백신의 초고속 개발은 생명과학 지식의 눈부신 발전뿐 아니라 고도화된 대규모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시스템 덕분에 가능했다. 바이오제약 분야에서 후발 주자인 한국은 아직 새로운 백신이나 치료제를 독자 개발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반도체 산업으로 단련된 초정밀 공정기술의 특기를 살려 세계 최고 수준의 바이오의약품 대량 생산 능력을 보유해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 생명과학기술뿐 아니라 각종 정보통신기술과 데이터과학도 방역과 백신 접종 등의 분야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냉전의 데자뷔 불러낸 코로나19
  코로나19와 백신이 불러낸 오래된 데자뷔가 있다. 바로 냉전이다. 팬데믹 바로 전에 이미 5G 이동통신과 데이터, 그리고 반도체를 두고 미국의 대중 규제가 이슈였다. 신기술 분야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 기술 냉전(tech-cold war)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백신은 자본주의의 깃발 아래 하나 된 줄 알았던 세계를 서방 자유주의 진영과 옛 동구권 구 사회주의 진영으로 다시 나누었다. 소위 백신 동맹이다. 서방 국가들은 검증된 기술을 사용한 러시아제 스푸트니크V 백신과 중국제 시노팜 백신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국민들에게 맞히지 않고 있다. 서방 국가들과 중·러는 제3세계 개도국들에게 백신을 무상 공급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과거 미·소 냉전기에 흔히 보던 광경이다. 팬데믹 이후의 국제 질서에 대해 의논하는 G7 정상회의에 한국, 인도, 남아공, 호주가 초청되었고, 10개국의 자유민주주의국가 연합체 D10이 회자되기도 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포위, 압박하는 구도다. 이 구도는 군사력 경쟁이나 무력 분쟁보다는 결국 디지털, 인공지능, 바이오를 위시한 과학기술 패권 경쟁이 될 공산이 크다. 과학기술 경쟁의 승자가 미래를 지배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과 산업경제, 그리고 안보가 연계(coupling)되는 경향은 점점 더 뚜렷해질 것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패권주의에 영합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 지식은 근본적으로 공공재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싸우는 동안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 바이러스의 정체와 감염병의 속성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학술지를 통해 세계와 공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주력 백신으로 쓰이고 있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과 벡시텍(Vaccitech)이라는 바이오 스타트업이 공동개발했는데, 특허권은 옥스퍼드대가 갖고 있다. 벡시텍은 옥스퍼드대 사라 길버트 교수가 공동설립한 대학 연구실 벤처기업이다. 벡시텍은 팬데믹이 종료되기 전까지는 특허사용료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코로나19와의 길고 험난한 전쟁을 치루면서 과학기술을 매개로 국제적인 공동체 의식이 발현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재빠른 추격국으로서 얻은 이익, 국제사회와 나눠야
  지난 세기 과학기술이 지속가능성보다는 경제성장, 공공성보다는 사적 이익에 봉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요 국가의 연구개발 활동에서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는 민간부문의 연구개발이 차지하는 비중은 70%가 넘는다. 정부 연구개발 역시 민간부문에서의 기술혁신 창출을 돕기 위한 원천기술 연구와 ‘목적이 있는’ 기초연구에 무게를 두고 있다. 민간 자본과 공공 재원이 연구개발에 투입되고, 이를 통해 생산한 과학기술지식이 혁신, 즉 새로운 지식의 상용화로 이어져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익을 증진한다. 이 수익 중 일부가 다시 연구개발에 투자되는 것이 현대 지식 자본주의의 순환 구조다. 선도적 혁신가는 시장을 통해 후발추격자와 비교할 수 없는 큰 보상을 획득하며, 신기술에 기반한 신산업을 일으키고 금융자본을 유치해 기업가치를 끌어올린다. 선도적 혁신가와 후발 추격자, 그리고 혁신의 과실에서 소외된 나머지 사이의 경제적 격차는 가속화된다.
  이런 순환 구조에서 과학기술은 국가 간, 계층 간 양극화를 초래한다. 국가 수준으로 보면 선도국은 미국이고 ‘재빠른’ 추격국은 한국이다. 한국은 현대 지식 자본주의 순환 구조의 최우등생이고 수혜국이다. 과학기술은 불평등을 야기할 수는 있지만 불공정하지는 않다. 과학기술혁신의 과실을 소외된 이웃과 나누어 형평성을 개선할 수 있다. 선진국들은 백신을 대량 구입해 무상으로 개발도상국에 제공할 것이다. 글로벌 팬데믹을 종식시키고 세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이 인류 공동의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얻은 이익을 국제 사회와 나누어야 할 책임이 크다.
과학기술은 국가 간, 계층 간 양극화를
초래한다. 국가 수준으로 보면 선도국은
미국이고 ‘재빠른’ 추격국은 한국이다.
한국은 현대 지식 자본주의 순환 구조의
최우등생이고 수혜국이다. 과학기술은 불평등을
야기할 수는 있지만 불공정하지는 않다.
과학기술혁신의 과실을 소외된 이웃과
나누어 형평성을 개선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과학기술이 국가의 안보와 평화 유지에 기여하는 바가 재조명되고 있다. 과학기술이 부국강병에 필수적이라는 식의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완성으로 사실상 단일 시장화된 세계에서,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같은 첨단 산업에서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과 대체 불가능한 경쟁력을 가진 나라를 상상해 보자. 이 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나라가 있을까? 서로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며, 이 나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애쓸 것이다.
지난 6월 9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바이오 산업 국제 행사 ‘바이오 코리아 2021’에서 직원이 로봇을 통한 비대면 검체채취를 시연하고 있다. ⓒ연합
  2050 과학기술은 천연자원과 달라서 무력으로 침탈하거나 겁박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미·중 기술냉전 시대에 한국은 자칫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처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보통신기술분야 첨단 산업과 미래 유망 산업의 경쟁력을 무기로 자주적 균형자로 부상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에서 비롯한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로 소재·부품·장비 사태가 벌어졌지만, 관련 연구개발투자를 크게 늘리고 민관협력을 통해 극복했다. 그러자 한국 산업계와 오래 협력해 온 애꿎은 일본 기업들만 손해를 보게 되었고 오히려 일본에 더욱 당당히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자강과 국격에 기여한다는 것이 요즘처럼 자명하게 드러나고 대중에게 각인되는 일은 없었다.
잠깐의 성취 아닌 끊임없는 연구개발 노력 필요
  잠깐의 성취에 도취될 때는 아니다. 과학기술 경쟁력은 상대적이고 동적인 것이어서 한번 이루어 놓으면 그대로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연구개발 노력이 경주되지 않으면 일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또한 과학기술 역량은 인재에 체화되어 있는 것이라서 우수한 인재들이 국내에서 연구개발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해야 하며 후속세대 양성에도 힘써야 한다. 최근 학령인구 감소와 이공계 대학의 위기 상황은 아찔한 위기의 전조가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이 반도체, 자동차, 스마트폰, 조선, 석유화학 등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여전히 추격자의 입장에 있는 분야도 있다. 생명과학과 바이오제약 분야가 대표적이다. 이런 분야에서는 추격자의 전략이 여전히 유효하다. 정부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연구개발 투자와 인재 양성에 나서고, 유치산업 육성 정책을 채택하고, 혁신생태계 조성에 나서야 한다. 바이오 분야는 기초연구와 기술혁신의 간극이 매우 좁다는 특징이 있다. 기초연구를 주로 담당하는 대학의 연구체계를 개선하고, 대학발 스타트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기술이전사업화 및 산학협력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초 참여정부 시절 정부가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국정 기조로 삼았던 적이 있다. 유의미한 시도였지만 당시에는 과학기술 중심 사회론이 체감되기보다는 선언적인 의미, 캠페인적인 성격으로 여겨졌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바이오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방역과 언택트 사회를 경험했다. 기술패권경쟁이 산업경제와 외교안보의 경계를 허물면서 그 중심에 과학기술이 있음을 목도하였다. 바야흐로 과학기술이 중심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앞으로는 여러 분야와 여러 층위의 국가 전략에서 항상 과학기술에 대한 고려를 포함할 필요가 있다.
박상욱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