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772021.07

예술로 평화

나의 존재 이유
“온세상을 마음으로 품으면
모든 것은 하나이다”



박순아 가야금 연주가

만일 그대가 시인이라면 이 종이 안에 떠 있는 구름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없으면, 비도 없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나무가 자랄 수 없다. 나무가 없으면, 우리는 종이를 만들 수가 없다. … 종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햇빛을 볼 수 있다. … 계속해서 종이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나무를 베어 제지 공장으로 실어 나르는 벌목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밀도 볼 수 있다. 우리는 벌목꾼이 매일 빵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먹는 빵의 원료인 밀 또한 이 종이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벌목꾼의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그 안에 들어 있다. … 그 모든 것들이 없다면 이 종이는 존재할 수 없다. … 시간, 공간, 대지, 비, 흙 속에 있는 광물질, 햇빛, 구름, 강, 온기가 모두 여기 있다. 모든 것이 이 종이와 함께 있다. 이 종이는 다른 모든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 종이는 비록 얇지만 우주의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함께 존재함(Inter Being)’이다.
-틱낫한-


  틱낫한 스님의 ‘인터빙(Inter Being)’이라는 말을 알게 되면서 나는 나의 진정한 삶의 이유를 찾았다. 내가 종이는 아니더라도, 비나 햇빛이 아니더라도, 벌목꾼이 먹는 빵을 만들 때 쓰이는 밀의 껍질 찌꺼기이더라도 분명히 존재 가치가 있을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디아스포라적, 민족 마이너리티, 소외당한 존재인 재일조선인이었던 ‘우리’에게 이 말은 민족심이나 애국심 같은 것보다 더 큰 의미에서 힘과 위로와 깨달음을 주었다.

낯선 악기, 인생의 길이 되다
  남의 나라 땅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3세인 나는 ‘이질적인 범위’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부모 세대의 온갖 고생과 피땀으로 만들어진 조선학교의 민족교육 덕분에 떳떳한 조선인으로서 애국심을 가득 안고 자랐다. 그 길에서 가야금이라는 우리 악기를 만났다. 우리 학교에는 이북에서 보내온 가야금이 있었는데, 어디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신기한 이 악기를 친구들과 같이 연주하는 게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차례의 오디션을 통해 나는 평양음악무용대학 통신교육생으로서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그때 훌륭한 스승에게 사사하며 이것이 진짜 ‘우리 음악이구나’, ‘가야금은 이렇게 연주하는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가야금에 더욱 빠져들었다. 우리 음악을 더더욱 깊이 알고 배우고 싶다는 희망과 욕심도 생겼다. 이후 북한의 유일한 해외예술단체 ‘금강산가극단’에서 연주 활동을 하게 되었지만 나의 공부 욕심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북쪽에서 없어진 우리 음악, 남쪽에는 남아 있는 소리와 음악. 그것을 알고, 찾고, 갖고 싶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공부한다’는 일이 나에게는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버리고 선택해야 하는 일’ 또는 ‘자기 인생을 바쳐서까지 선택해야 할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누구든지 살다 보면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국적을 바꾸고(이것은 나라를 버린다는 큰 자괴감이 되기도 했다) 스승과 친구와 동료들의 인연이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큰 결심이 필요했기에 많은 시간을 미련하게 고민했다. 지금도 이 선택이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내가 걸어온 길과 삶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2019년 12월 남산국악당 공연 <노쓰코리아 가야금>에서 연주하는 박순아 연주가

완전해지기 위해 찾아야 했던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사람들은 완전해지기 위해 자신에게 부족한 그 무언가를 찾으려 짧은 인생을 바친다. 나 또한 절대로 완벽할 수 없는 예술의 길을 걸어오면서 항상 나를 완전하게 해 줄 ‘무언가’를 찾아왔다. 사람들마다 ‘무언가’는 모두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바로 이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질감, 없어진 나라의 국적을 지닌 디아스포라적 존재, 문화적 전통의 뿌리가 없다는 콤플렉스 즉, 정체성, 아이덴티티였다.

  내 선조의 고향은 남한, 정신적 고향은 북한. 그러나 남에 가도 북에 가도 외국인 신세인 우리는 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디에도 정치적 투표권이 없었기에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음악인이 된 후에도 내 이름 앞에는 ‘일본에서 온’, ‘재일동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렇게 불릴 때마다 ‘너는 아니야’, ‘너는 절대 끼어들 수 없어’라는 말처럼 들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의 피해의식이 스스로에게 저주를 거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런 저주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실력으로 인정받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나는 음악을 좋아했고, 하면 할수록 음악이라는 세계에 푹 빠졌다. 음악을 하기 위해서라면 가난도 고된 일도 외로움도 별 고생이 아니었다.

  내가 추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소리에 대한 고민, 우리 선조가 만들어 낸 멋진 전통음악에 깃들어 있는 깊은 성음은 무엇이며 그 음악을 들으며 느껴지는 감동은 무엇인지, 그리고 음악을 하는 나는 어떤 존재인지, 나는 왜 음악을 하고 있고, 앞으로 무엇을 위하여 음악을 할 것인지… 정답은 없다. 다만 그것을 찾으며 걸어온 길에서 내가 경험한 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을 아직 평화롭지 못한 사회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후대에 전하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세월에서 배우고 경험에서 배우고 스승에게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 이 모든 배움들은 재일동포로 태어남으로써 두 배, 세 배 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리를 하나씩 깨달아 갈 때마다 스스로의 피해의식과 강박관념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내가 다다른 답은 ‘Inter Being’이다. 온 세상을 마음으로 품으면 모든 것은 하나이다. 그러면 미울 것도 미운 사람도 없이 모든 일은 나에게 달려 있다. 그렇게 세상을 품고 싶다. 가장 먼저는 남과 북 우리의 나라, 우리의 동포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