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평화의 길
걸어온 길, 그리고 가야할 길
인제 평화의 길
강원도 인제. 예부터 신성한 동물로 추앙받았던 상상 속 기린의 ‘린(麟)’과 동물의 발굽을 상징하는 ‘제(蹄)’가 합해져 만들어진 인제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인제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 하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민국 시·군 중에서 홍천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땅을 보유한 인제는 한때는 멀게만 느껴졌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접경지역답게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대한민국 남성들에게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를 읊조리게 만들던 고장이기도 하다.
인제군의 면적은 1,646㎢. 한국전쟁으로 만들어진 DMZ와 이웃한 북한 금강군에 포함된 257㎢를 포함하면 1,903㎢를 넘어선다. 현재의 면적만으로도 제주도보다는 약간 작고, 서울의 2.7배, 평양과는 엇비슷한 넓이다. 국도 44번, 46번, 31번에 더해 최근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인제-원통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가 됐다. 2018년 시민들이 주도한 ‘인제군 대중교통 혁신위원회’가 활동하면서 공용버스가 다니고, 새로운 버스 노선도 개척되면서 천 원만 내면 인제군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게 됐다.
김호진과 인제천리길
  길은 인간의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인제에는 함께하고 싶은 몇 개의 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국도 몇 번’, ‘00 간 고속도로’가 아니다. 전 구간이 470km가 넘는 ‘인제천리길’, 지금 한창 조성 중인 ‘DMZ평화의 길’,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인제 평화의 길’이 그것이다.
인제천리길을 탐사하는 김호진 씨
  이 길들에는 사람이 있다. ‘인제천리길’에는 김호진(61세)이 있다. 김호진은 인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 암울했던 시대,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에는 농민운동에, 그 후에는 남북의 농업협력까지… 쉼 없이 한길을 걸었다. 치열한 삶에 더해진 과로와 스트레스는 그를 쓰러뜨렸다. 몸은 마비되고 수년의 병원 생활과 재활치료가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또 신장암이라는 병마가 덮쳤다. 하지만 그는 일어났다. 그리고 걸었다. 처음에는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고향 옛길, 보부상들이 태백산맥을 넘어 이 마을 저 마을로 소금과 방물 등짐을 지고 다니던 길을 생각해내고, 하나씩 복원하기 시작했다. 일반 사람들이 다니기 어려웠던 길은 장애가 있는 본인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경사도가 있는 길로 다시 열었다. 인제와 서울 등지에서 소문을 듣고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척한 길이 무려 477km, 34개 구간이 넘고 지금도 개척 중이다. 친한 지인 몇 사람과 함께 시작했지만, 이제는 사단법인 등록도 마쳤다. 길을 모니터링하고, 걷기모임 행사를 알리고, 함께 걷고 안내하는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다. (사)인제천리길은 이제 인제의 속살을 전국, 아니 세계에 알리는 가장 멋진 창이 되었다.
인제천리길 2-1코스 자작나무숲길
박광주와 DMZ 평화의 길
  ‘DMZ 평화의 길’에는 박광주(50세)가 있다. 박광주는 인제군 서화면 서화2리 마을 이장이다. 요즘 시골의 이장치고는 많이 젊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인천 처자를 만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에서 횟집도 해보고, 농사도 짓고, 산에서 약초도 캐고, 마침내 이장까지….
  그가 자란 서화리는 원래 민간인 통제선 안에 있는 마을이었다. 이후 민통선이 북상하면서 1979년에 새롭게 조성된 마을인데, 마을 최북단이 민통선 검문소다. 마을 큰길을 경계로 동쪽은 군부대가 서쪽은 주민들이 거주한다. 주민 수보다 주둔하는 군인들의 숫자가 훨씬 많다. 사격장의 총소리, 대포소리 그리고 훈련하는 군인들을 목격하는 것은 마을의 오래된 일상이다. 한국전쟁 전에 서화리는 소련군정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치하던 이북 땅이었다. 아직 서화리 북쪽지역 서화면의 일부인 가전리, 서희리, 이포리, 장승리는 DMZ와 금강군 행정구역이다. 당연히 이곳에서 분단과 대치, 평화는 주민들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주요한 요소다.
DMZ 평화의 길 해설사를 교육하는 박광주 이장
  한편 서화리는 한반도 3대 생태축 중 두 개(백두대간과 DMZ, 나머지 하나는 서해 도서 연안 습지다.)가 교차하는 가장 건강한 생태계, 생명의 고장이다. 서화리가 갖는 생명과 평화의 가치에 주목한 박광주는 이장에 취임하자 곧바로 ‘(사)설악금강서화마을’ 결성을 주도한다. 때마침 문재인 정부는 접경지역과 DMZ의 평화지대화사업의 일환으로 한반도의 동서를 연결하는 평화누리길 조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사)설악금강서화마을은 서화리 주변 생태적으로 우수하고 경관이 아름다운 지역과 민통선 이북지역인 가전리 습지, 1052고지, 대곡리 숲길, 36~38통문 사이 철책을 걷는 ‘DMZ 평화의 길’ 사업을 제안했고, 탐방사업 운영 주체로 선정되었다. 예상치 못한 아프리카돼지열병과 코로나19 사태로 정상적인 사업 운영이 어렵지만, 탐방을 안내할 해설사들을 교육하고 숙박 및 안내시설을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과 서화리
인제군협의회와 인제 평화의 길
  마지막 길은 앞으로 만들어지는 길이다. 여기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인제군협의회(회장 전현진)’가 있다. 인제군에는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가 즐비하다. 그만큼 간직하고 있는 고통과 아픔도 크다.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서로에게 총부리를 맞대고, 고지를 뺏고 빼앗기 위해 진퇴를 거듭하며 산자락에서 쓰러져갔다. 인제에는 800m가 넘는 준령이 스무 개가 넘는다. 그 하나하나에 국군과 인민군 청춘들의 피로 얼룩진 역사가 있으며, 지금도 전사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다.
  속칭 ‘빨간다리’. 인제읍을 흐르는 덕산천 위에 놓여 합강리와 덕산리를 연결하는 ‘리빙스턴교’의 유래는 애틋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교였던 리빙스턴 중령은 1951년 7월 홍수로 범람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지체하던 중 인민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다. 리빙스턴 중령은 사망하기 전 유언을 통해 부인에게 강 위에 다리만 있었어도 본인이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사재를 털어서라도 다리를 놓아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을 찾은 중령의 부인은 이곳에 다리를 놓고 ‘리빙스턴교’라고 이름을 짓는다. 1957년 철로 된 빔에 판자를 깔아 만든 길이 150m, 넓이 3.6m의 이 다리는 노후화로 인해 1970년에 철골콘크리트 다리로 다시 개설됐다.
  해방 직후 38선이 그어졌던 소양강 위에 2009년 ‘38대교’가 지어졌다. 인제군 남면 관대리와 남전리를 잇는 38대교는 이름처럼 분단의 상징이었지만,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담아 ‘평화의 다리(가칭 인제평화대교)’로 명명하고, 인근 주변은 평화공원으로 조성하여 인제군의 대표적인 평화여행 명소로 발전시키려는 주민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서화면에 2009년 터를 잡고 지금까지 6만 명이 넘는 시민·학생·공무원·군인·외국인들에게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교육운동을 수행하고 있는 (사)한국DMZ평화생명동산 역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인제군협의회 인제평화플랜 및 평화과제 발굴 준비위원회 회의
  인제군협의회는 인제군의 모든 길, ‘인제천리길’과 ‘DMZ 평화의 길’ 그리고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와 생명의 의미를 성찰하는 길을 묶어 ‘인제 평화의 길’로 명명하고, 각각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엮어 인제군을 대표하는 길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인제 평화의 길은 단순한 관광이나 여행길이 아니다.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고, 다시금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전쟁에 반대하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번영을 위해 나 자신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길, 순례의 길이다.
  세계적으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지상과 천계가 만나는 구마노고도 순례길, 힌두교의 대표 성지인 아마나스 동굴로 향하는 순례길 등이 알려져 있다. 나의 평화, 나와 세상과의 평화, 자연과의 평화 실현을 다짐하는 인제 평화의 길도 그 반열에 들 날이 머지 않았다. 이 땅에서, 아니 지구촌에서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가 구현되길 바라는 모든이여, 인제 평화의 길로 오시라.
*사진 필자 제공
정범진
한국DMZ평화생명동산 부이사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