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772021.07

평화읽기

30년 내전의 종식

캄보디아 평화프로세스와
UN의 역할



2021년은 캄보디아 내전이 종식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흔히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통칭하는 잔혹한 크메르 루주(Khmer Rouge, 이하 KR) 통치체제의 몰락 이후 약 13년 동안 이어진 캄보디아의 내전은 1991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서명된 평화협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일단락되었다. 그 후 캄보디아는 대규모 전후 재건, 1997년의 군사 쿠데타, 훈센 총리의 장기집권, 급속한 경제성장과 심각한 분배의 문제 등을 겪으며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는 크고 작은 위기 속에서도 전쟁 재발을 막아내며 긴 시간 비교적 안정된 안보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캄보디아 정치사에는 평화프로세스 기간 동안 이루어진 UN의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지원이 큰 영향을 미쳤다.



네 개의 세력 충돌한 캄보디아의 평화 협상
  1979년에 발발한 캄보디아 내전은 내전 시기까지 나라를 통치하던 KR 세력과, KR 정권을 물리치고 새로운 정부를 구축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하 PRK) 세력, 과거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으나 1970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이 이끄는 푼신펙(FUNCINPEC), 그리고 1960년대 정부에서 고위직 관료로 일하던 일부 명망가들이 중심이 된 캄보디아 민족전선(KPNLF)이라는 4개의 무장세력 사이의 투쟁이었다. 이웃 베트남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새로운 정부를 자임하던 PRK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전면전을 펼치는 가운데 중국과 서방 국가의 지원을 받는 나머지 세 무장세력이 게릴라전으로 맞섰고, 어느 일방도 결정적 승기를 잡지 못한 채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PRK 정부의 새로운 총리로 선출된 훈센과 반PRK 연대의 대표 시하누크 국왕 사이의 평화회담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협상은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던 대규모 베트남군의 철수가 이루어진 1989년부터 시작되었다. 협상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군인들의 무장해제, 전쟁 종료 후 KR의 정치 참여 문제, 그리고 총선 전까지의 과도기를 관장할 기구 구성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맞섰고,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UN 안보리에서 1990년에 제시한 중재안은 협상의 물꼬를 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중재안에서 UN은 ①UN 과도통치기구가 평화협정 후 총선까지의 과정을 총괄하되, ②이 시기 주권의 상징인 국가최고평의회를 설치하고, ③무장세력들의 모든 군사력을 해체하며, ④PRK의 행정력은 유지하되 UN의 지휘하에 두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후 평화 협상은 이러한 UN 중재안의 틀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결국 1991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이에 대한 합의안을 담은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파리 평화협정이 조인되자 UN은 그 이행과정을 직접 관장할 수 있는 과도적 권위체인 UNTAC를 구성했다. UNTAC는 캄보디아의 전후 첫 총선으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는 1993년 후반까지 대략 2년의 기간 동안 군사,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전후 복구 과정을 관장하고 관리하는 권한을 가진 UN 중심의 권위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내전에 참여한 군인들의 무장해제와 총선을 통한 정부 수립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대규모 임무 수행을 위해 UN은 약 1만 5,900여 명의 군사력, 3,400여 명의 민간 경찰력, 2,000여 명의 민간 지원인력을 파견했고, 약 16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했다.

  그러나 UN의 활동은 국내 세력의 저항으로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특히 UN의 중립성과 이행과정의 투명성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던 KR의 무장해제 거부와 선거 보이콧은 전체 평화협정 이행 과정에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또한 선거가 임박하면서, 행정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PRK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UN의 감독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무시하고 방해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많은 문제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1993년 5월 진행된 전후 첫 총선이 심각한 폭력사태 없이 전국적으로 치러졌다는 것은 UN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 시하누크 국왕이 이끄는 푼신펙이 PRK 세력을 대표하는 캄보디아 인민당(CPP)을 누르고 제1당이 되면서 상황은 다시 혼란으로 이어졌다. CPP 대표 훈센이 선거 결과를 거부하고 즉각 무장투쟁 재개를 선언했던 것이다. 이후 UN을 비롯한 많은 해외 세력들의 적극적인 중재와 시하누크 국왕의 막후 협상을 통해 푼신펙과 CPP가 공동 정부를 구성하면서 UN 주도의 전후 캄보디아 평화프로세스는 마무리되었다.

2012년 9월 21일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평화행진을 하는 학생들 ⓒ연합

UN 평화 지원의 명암
  캄보디아 평화프로세스는 1990년대에 이루어진 국제사회의 대규모 평화지원 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평화협상 과정에서 단순한 대화 촉매자의 역할을 넘어서, 협상 내용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협상 진전을 위한 외교적·경제적 압력을 가하는 등 적극적인 중재자를 자임했다. 또한 협상 이후의 이행 과정에서 UN은 사실상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군사-정치-사회 운영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적극적·포괄적인 국제사회의 지원은 전후 과도기 캄보디아에서 무장세력들의 도발을 억제하고, 일상의 치안을 유지하면서 국가운영체제의 임시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UN이 과거 무장세력들의 크고 작은 저항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이후에 나타나는 장기적인 정치 불안정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비판의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UN과 서구 국가를 대표하는 많은 지원기구들이 대거 간여하면서 국가의 공식 운영 시스템 전반에 서구의 사상과 제도, 절차가 대규모로 이식되었다. 이러한 시스템들은 당시의 정치구조와 그동안 캄보디아 사회가 유지해 온 사회·문화적 환경에 맞지 않아 공식적 시스템과 실질 운영 사이에 큰 간극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성용 오타고대학교
평화분쟁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