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62022.04.

냇강마을에 핀 연꽃

접경지역 사람들

우리는 인제에 산다
우리는 인제를 꿈꾼다

38도선과 휴전선으로 인해 남북 모두에 속했던 체제 변화의 경험은 많은 접경지역이 공유하는 아픈 역사다. 하지만 이 아픈 경험은 접경지역 고유의 평화가치로 계승된다. 천혜의 생태보고 인제에서 생명의 가치와 함께 평화의 가치를 지니고 살고 있는 인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수복지구의 경험은 남북한의 통일이 전쟁과 점령이라는 방식을 통해 어느 한쪽 체제에 일방적으로 ‘편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매우 실질적으로 보여주며, 상호 존중의 체제 통합 및 전환과 그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한모니까, 『한국전 쟁과 수복지구』 책머리에 中)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인제 사람들이 겪은 남북 체제를 연구한 한모니까의 표현대로 인제 사람들은 일제 치하의 ‘신민’에서 이북 ‘인민’이 됐고 유엔 군정의 ‘주민’을 거쳐 한국 ‘국민’이 됐다. 이런 삶을 경험한 인제 사람들에게 평화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하지만 인제는 분단의 비극만이 서린 곳은 아니다. 인제는 생명의 고장이기도 하다. 서울시 2.7배에 달하는 면적의 90%가 산지로 이곳에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해발 800m 이상의 높은 산 가운데 5분의 1가량이 위치한다. 때문에 난대부터 한대까지 폭넓은 식생대가 분포해 우리나라 식물의 30% 이상이 서식한다(『인제 군지』 상편). 자연과 공존하며 평화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인제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2003년 농촌전통테마마을, 2008년 강원도 대표 모델마을로 선정된 냇강마을의 전경
평화를 꿈꾸는 생명의 고장 인제
김숙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인제군협의회 자문위원의 주된 관심은 평화다. 그의 곁에는 인제군 남면 청소년들이 함께한다. 봉사활동이라면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적극적인 김 위원은 수년 전 청소년들과 함께 ‘평화동아리’를 만들었다. 이후로 지속해서 인제군 관내 전쟁 및 평화와 관련한 장소를 방문하고 북한이탈주민을 초청해 강의를 듣는다. 식목일에는 평화의 나무를 심는 등 여러 평화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청소년들과의 세대 차이를 자연스럽게 극복했어요. 우리 고장의 아픈 역사에 공감하며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는 평화공감 확산에 더욱 기여하고 싶어요.”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 설정된
임시군사분계선 38선의 표지석

1966년 당시의 서화면사무소 ⓒ인제군청


김수진 생태교육 강사(농민)의 관심은 농업과 아이들이다. 전라도가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환경운동을 하다 인제로 귀촌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는 블루베리 약 500그루를 유기농법으로 키워 초등학생 대상으로 ‘토종씨앗 생태텃밭교육’을 한다. 유치원생 대상으로는 ‘생태, 먹거리, 평화, 인권, 문화를 주제로 그림책을 읽어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한계초, 서성초, 월학초, 하남초, 원통초, 기린초, 부평초, 서화초와 각 유치원에서 한다고 하니 인제군 전 지역이 그의 활동무대라 할 만하다.

숲을 가꾸는 사람들이 사는 곳, 숲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는 곳, 수달이 강에서 헤엄치는 곳, 자가용보다 버스와 자전거 이용이 편리한 곳, 연령에 맞는 놀이터(공원·돌봄센터·경로당)가 동네방네 있는 곳, 오일장에서 웬만한 생활용품을 살 수 있는 곳, 안전하고 편리한 인도가 있고 잠시 앉아 쉬어 갈 수 있으며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는 곳, 집집마다 키가 큰 울창한 나무가 있는 인제. 바로 그가 꿈꾸는 인제다.

“귀촌 초반에는 없는 것, 부족한 것만 보였어요. 지금은 인제만이 가지고 있는 것, 인제가 내어주는 것이 보여요. 덕분에 연중 푸른 숲과 하늘과 강을 만나고 있어요.”


박광주 서화2리 이장의 주된 관심사는 마을이다. 주민 연령대가 70대 이상인 서화리에서 50대 초반의 그는 젊은 이장이다. 인제군 최북단 서화2리는 마을 전체가 민간인 통제선 안쪽 지역이었다. 1970년대 말 77가구가 입주하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니 집들은 40년이 넘어 낡디 낡았다. 집들은 개보수 중이고, 금강산으로 가는 최단거리 도로이자 마을 관통로는 확대·포장하느라 마을 곳곳이 공사판이다.

박 이장의 휴대폰은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울린다. 옆집 아주머니는 보일러가 말썽이라고 어서 와서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고 어떤 때는 주민자치센터에 이러저러한 민원을 넣어 달라 하기도 한다. 군청에서는 ‘평화의 길’ 사업 관련으로 중앙부처에서 관계자가 방문했으니 탐방코스를 안내해달라 하기도 한다. 통화를 마치면 또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DMZ평화생명 청소년 영상 축제’ 기획회의를 해야 하니 서울로 와달라, 인북천 수질오염을 조사하자, 군부대 사격장 피해보상 대책회의를 하자는 등 마을과 고장을 위하는 박 이장의 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간다.

“마을을 위한 일이라면 한 살이라도 젊은 제가 해야죠. 우리 아이들이 돌아와 살고 싶은 인제로 만들고싶어요.”

냇강마을에서는 과거 원형 그대로 재현한 뗏목을 체험할 수 있다.

인제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정성으로 홍천과 춘천에서 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까지 갔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박수홍 냇강두레협동조합 이사장의 활약도 돋보인다. 냇강마을은 소양강으로 흘러드는 인북천 변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임산물 채취와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전형적인 농산촌마을은 박 이사장이 돌아온 이후 2003년 농촌진흥청의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선정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산림으로 목재가 우수하고 한강 상류에 있던 인제는 예부터 물길로 나무를 운반하는 뗏목이 주요 산업이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는 궁궐과 양반들의 기와집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 대부분을 한강 물길로 공급받았는데 이에 인제의 목재도 활용됐다. 냇강마을은 뗏목을 원형 그대로 재현한 후 안전도를 높여 ‘뗏목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8년 강원도 대표 모델마을로 선정됐고, 이듬해 전국농촌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영예를 얻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사라진 1945년부터 1954년까지 인제군의 역사를 살려내는 게 저의 또 다른 꿈이에요.”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인제
김종희 한국어 강사는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고향은 대구지만 군무원 남편을 따라 인제에 정착했다. 외국인을 가르치는 강사답게 지역의 다문화가정, 이주노동자들의 안정과 권익보호를 위한 봉사활동에 열심이다. 내실 있는 상담과 지원을 위해 강원도를 넘어 다른 지역까지 찾아가 사례를 배우고 경험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고기를 먹지 않고 물병을 항상 들고 다니며 주머니에 손수건이 없으면 하루종일 불편해한다. 그의 생활을 이렇게 바꾼 것은 인제의 자연이었다. 30대 중반까지 살던 도시에서는 고개를 들어야만 보였던 하늘이 인제에서는 항상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보다 자연이 먼저 보인다는 인제. 매일 마주하는 인제의 하늘과 땅과 산과 물이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제가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그대로였으면 해요. 산도 마을도 길도 사람을 위해 가꾸지 않았으면 해요.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자연이 아닌 자신을 바꾸려 하겠지요.”

냇강마을 주민참여 들꽃재배

김정은 생활지원사(돌봄노동자)는 세 아이의 엄마지만 그의 활동 반경은 누구보다 넓다. 특히 친화력과 조직력은 독보적이다. 인제군의 열악한 의료환경 개선을 위한 실태조사, 인제의 숨은 옛길을 찾아 복원하는 ‘인제천리길’ 참여, 자발적 학습모임 ‘자치와 자급’을 비롯한 각종 사회교육 이수, 독거 어르신이나 도움이·요양이 필요한 분들을 찾아가는 가정방문 봉사가 그가 하는 일이다.

그는 이 많은 일을 결코 혼자 하지 않는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한다.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때로는 고단하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사람과 자연의 소중함을 배워나간다는 그. 이러한 일들이 자신의 발걸음에 기억되고 인제에 기록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에게 인제는 자연과 사람의 숨소리를 함께 느끼고 사는 곳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빛을 발하지요. 이곳에서 자연과 사람이 하나임을 알게 됐어요. 자연을 허락해주는 인제가 누구에게나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라요.”


우리는 접경지역 인제에 산다. 아이들과 함께 평화를 꿈꾸고 더 나은 마을의 미래를 만들며 사람과 자연이 생명을 공존하는 이런 인제에 산다.

사진 제공: 정범진, 김숙자, 김수진, 박광주, 박수홍, 김종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인제군협의회
인제군협의회는 ‘우리고장 평화플랜 사업’의 일환으로 시민대화에서 제안된 ‘인제군 평화봉사단’을 발족했다. 인제군 평화봉사단과 함께 ‘청소년 평화봉사단’을 주축으로 관내 평화현장 탐방 및 학습, 북강원도 금강군 청소년들에게 영상편지 쓰기, 북한이탈주민과 함께하는 북한 음식문화 체험 및 나눔, 군부대 주변 생태환경 정화 봉사활동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정 범 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사)한국DMZ평화생명동산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