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62022.04.

㈜요벨은 북한이탈주민의 자립을 돕는 카페를 운영한다.

평화사랑채

신뢰로 만들어가는 평화
“조언보다 경청으로 마주해주길”

한국사회에서 북한이탈주민으로 산다는 것
“스트로베리 스무디 주세요.” “저희 카페에는 딸기 스무디밖에 없는데요.” 손님의 질문에 대답했던 바리스타는 나중에 딸기가 영어로 스트로베리라는 것을 알고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런 바리스타에게 회사 동료들은 티슈와 글라스를 몰라 호프집에서 일주일 만에 쫓겨나야 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위로와 격려를 전했다. 그렇게 우리는 ‘신뢰서클’을 만들어갔다.

북한이탈주민이 한국사회에 잘 정착하도록 지원하는 ㈜요벨

신뢰서클(Circle of Trust)이란 미국의 저명한 교육학자 파머 파커(Pamer Parker)가 자신의 저서 『A Hidden Wholeness』에서 정의한 것으로 자기 영혼의 목소리를 토로할 수 있는 공동체, 각자의 영혼을 환영하고 서로 돕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가리킨다.

사회적 기업 ㈜요벨은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해 정서적,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북한이탈주민의 자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됐다. 요벨이 운영하는 카페에서는 북한이탈주민 직원들을 배려하기 위해 메뉴명을 한글화하다 보니 이런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한다.

인도 출신의 미국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문화비평가였던 호미 바바(Homi Bhabha) 교수는 정신분석적 비유로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이란 문화적 차이를 바탕으로 동일성이나 전체성에 포섭되거나 사라져 버리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경합하고 협상하는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긴장과 이중성이 존재하는 역동적인 공간이라고 정의했다.

호미 바바 교수가 이야기하는 제3의 공간이나, 파머 파커가 이야기하는 신뢰서클은 모두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이룰 것인지를 다루는 개념이다.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은 제3국에서보다 한국사회에서 신뢰서클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족의 해체를 경험하고 혈연, 학연, 지연이 없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형성해가야 하는 북한이탈주민들에게 한국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77년이라는 기나긴 분단,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 서로 다른 의사소통 방식, 문화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은 동아시아 유교문화, 그 위에 근대화와 서구화로 유입된 자유민주주의 양식과 자본주의 문화가 놓여 있는 아주 복잡한 구조로 구성된 사회가 바로 북한이탈주민이 느끼는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휴전 국가인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단문화, 즉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서 생성된 문화는 이단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다층구조로 형성된 사회문화 분위기 속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이 북한사회에서 통용되던 문화를 드러내고 살기란 쉽지 않다.

박요셉 대표이사는 한국사회에 정착한 17년차 북한이탈주민이다.
평화는 작은 신뢰가 쌓여 만들어지는 것
필자 또한 그랬다. 하지만 2005년 한국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필자에게는 신뢰서클을 형성해준 미국인 룸메이트 아론이 있었다. 그 덕분에 사회적 기업 요벨을 설립해 또 다른 북한이탈주민 친구들이 신뢰서클을 형성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다.

당시 아론은 북한에 있는 고아들을 위한 빵공장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때문에 북한에 들어가기 전 북한에 대해 충분히 공부해야 했다. 필자는 대학입학 준비를 위해 영어공부에 몰입하고 있던 때라 미국 문화에 대해 알아야 했던 시기였다. 아론과 함께했던 6개월은 서로의 필요도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나’를 온전히 드러내기 어려운 한국사회에서 ‘나’의 모습 그대로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론은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며 조언이나 바로잡기 보다는 경청해주었다. 때문에 아론과 필자는 서로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짧다면 짧은 6개월의 시간은 신뢰서클을 형성하고 내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신뢰서클은 인종, 종교 등이 문제 되지 않는다.

남과 북의 주민들이 만났을 때 어떻게 신뢰서클을 형성할 수 있을지 파머 파커 교수가 제안한 간단한 지침을 나누고 싶다. 고치기 금지, 구원하기 금지, 조언 금지, 바로잡기 금지. 이 4가지 금지사항만 지킨다면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될 것이다. 남북 주민들이 만났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조언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말고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하는 방식으로 반응해 보는 것이 신뢰서클을 만들고 평화를 이루어가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신뢰서클은 가족, 친구, 학교, 직장 등 우리 삶 저변의 모든 곳에서 충분히 만들어갈 수 있다. 배울 것이 없는 상대는 없다는 열린 마음으로 폭 넓게 소통하며 서로를 마주할 때 개인 간 신뢰서클이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평화, 한반도 평화의 기초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박 요 셉 ㈜요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