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92022.07.

지난 6월 2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

국제

21세기 ‘그레이트 게임’과
한일관계

미국이 유라시아 심장지대에서 중국·러시아에 대한 포위망을 넓혀가고 있다. 미국의 대전략 속에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과제와 전략을 진단한다.

탈냉전 이후 30년에 걸친 미국의 동유럽 확장 및 중국 통합 대전략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유럽 전장(戰場)에서의 우크라이나 전쟁 및 동아시아 전장에서의 미중 패권경쟁 격화는 그 징후로 읽힌다.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지구화 과정이 잠정적 휴지상태로 돌입했다. 중국 및 러시아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해 두 나라를 자유주의 국제질서로부터 구축(驅逐)하겠다는 미국의 새로운 대전략은 유럽 및 동아시아 전장에서 지정학 및 지경학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강대국 정치(Great Power Politics)’의 화려한 귀환이다.
미국의 중러 포위망 구상 속 한일관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대전략은 지구적 차원에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대립 구도를 창출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동맹국 및 제휴국과의 연대 확대를 통해 미국의 지정학 및 지경학 우위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유럽 전장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결속력을 확인하고 스웨덴과 핀란드를 가입국으로 받아들여 대러 억제력 증강을 노리고 있다. 동아시아 전장에서는 4자 안보회담(QUAD·쿼드) 및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통해 대중 억제력 증강을 도모한다.

그 절정에 6월 말 나토 정상회의를 통해 유럽 동맹국과 인도·태평양 동맹국 연결성을 강화한다는 미국의 구상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로 구성되는 유라시아 ‘심장지역(heartland)’에 대한 자유주의 국가들의 포위망 구축을 완성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재림이라 부를 만하다.

나토 가맹국과 쿼드 참여국을 잇는 선을 지도 위에 그려보면 브뤼셀에서 뉴델리를 거쳐 캔버라를 돌아 도쿄에서 그 마침표를 찍는다. 유럽과 남아시아 그리고 서태평양을 포괄하는 하나의 전략적 원호(圓弧)가 중국과 러시아를 넉넉히 둘러싸는 셈이다. 이제 유라시아 심장지역 포위망 완성에서 남겨져 있는 유일한 숙제는 서울과 도쿄를 이어 동북아시아로 전략적 원호를 확장하는 일이다.

한일관계 개선이 양국관계를 넘어 지역적 차원에서 그리고 지구적 차원에서 그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한국과 일본이 적절한 수준의 관계 개선을 이뤄내지 못하고 교착상태를 지속할 경우 유라시아 심장지역 포위망은 미완성에 그치고 만다는 의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을 압박할 유라시아 심장지역 포위망의 맹점(盲点)이고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에게 탈압박으로 맞설 유라시아 심장지역 포위망의 틈새인 셈이다.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과 일본의 겐론 NPO가 공동으로 기획한 2021년 ‘한일국민 상호인식 조사’ 결과는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일관계에 대한 양국 국민의 심상(心想)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선 한국인의 63%가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일본인의 49%가 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각각 가지고 있었다.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태라고 지적할 때 흔히 인용하는 수치들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일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만큼 악화한 국민감정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면서까지 관계 개선에 선뜻 나서기 어렵다는 근거로 등장한다. 양국 국민들이 상대국에 대해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 관계 개선에 난관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한일 간에 존재하는 대립을 어떻게든 미래지향적으로 극복해야한다”는 진술에 한국인의 46%, 일본인의 23%가 각각 동의하고 있고, “적어도 정치적 대립은 피해야 한다”는 진술에 한국인의 29%, 일본인의 32%가 각각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역사 갈등으로 악화된 한일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진술에 한국인의 71%, 일본인의 47%가 각각 동의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과반수를 거뜬히 넘는 국민이, 일본에서는 과반수에 가까운 국민이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하거나 혹은 관계 악화의 불모성을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위협으로 한국과 일본의 안보협력 의지가 높아지는 가운데 한일관계 개선에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은 한국 여행을 위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일본 시민들이 일본 도쿄 소재 한국 영사관에 줄을 서 있는 모습 ⓒ연합

한일 양국 국민들의 과반수가 상대국에 호감을 느끼진 않지만 비호감 상대국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여론의 양가성(兩價性)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묻는 질문 가운데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일 협력을 추구하는 것이 상호이익이 되기 때문”이라는 응답에 한국인은 2020년 10%가 동의한 반면 2021년 21%가 동의했고, 일본인은 2020년 13%가 동의한 반면 2021년 17%가 동의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공동의 안보이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응답에 한국인은 2020년 8%가 동의한 반면 2021년 18%가 동의했고, 일본인은 2020년 19%가 동의한 반면 2021년 29%가 동의했다. “민주주의와 같은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응답에 한국인은 2020년 7%가 동의한 반면 2021년 15%가 동의했고, 일본인은 2020년 9%가 동의한 반면 2021년 18%가 동의했다.

미중 갈등의 격화, 미국과의 동맹 강화, 민주주의 가치 공유 등 유라시아 심장지대를 포위하려는 미국의 새로운 대전략의 동기, 수단, 내용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은 모두 ‘동조화(synchronization)’의 수준을 높이는 선택을 선호한 셈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 인식이 있다. 중국을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한 한국인의 비율은 2020년 44%에서 2021년 62%로 증가했고, 일본인의 비율은 2020년 63%에서 2021년 71%로 증가했다.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자국의 미래를 중국의 도전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한일관계를 양국 차원에서만 보면 양국 국민의 상호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만 미국의 유라시아 심장지대 포위망 완성이라는 지구적 차원에서 조망하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상당한 수준의 안보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뚜렷하다. 한일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전자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후자의 전망을 최대화하는 전략적 구상을 설계할 필요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발견이다.

한일 양국 교류의 상징과도 같은 김포-하네다 항공 노선이 지난 6월 29일 재개됐다.
사진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열린 ‘김포-하네다 운항 재개 기념식’ 모습 ⓒ연합
역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한국의 국가전략 구상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1945년 ‘동서 냉전’ 질서, 1972년 ‘미중 화해’ 질서, 1989년 ‘미국 단극’ 질서의 다층 질서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동서 냉전 질서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분리를 전제로 자유진영 내부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규칙과 규범을 투사하는 체제였고, 소련이라는 적대적 초강대국의 존재 때문에 자유진영 내부에서의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미중 화해 질서는 공산진영 내부의 분열을 전제로 중국을 자유진영으로 편입하여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규칙과 규범을 투사하는 체제였고, 중소 대립을 매개로 미국 주도 자유진영의 대소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 단극 질서는 소련 주도 공산진영 붕괴를 전제로 러시아 및 동유럽 국가를 자유진영으로 편입하여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규칙과 규범을 전 지구적으로 투사하는 체제였고, 소련이라는 적대적 초강대국의 부재로 자유진영 내부에서의 결속력이 약화하고 있었다.

2000년대 후반 미국발 경제위기 및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 단극 질서가 막을 내리기 시작하자 미국은 중국 및 러시아를 자유주의 국제질서로부터 분리한다는 지경학적 ‘디커플링(decoupling)’ 전략으로 전환했다. 오바마 행정부 2기부터 시작된 ‘아시아 재균형’ 전략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이어졌고 바이든 행정부도 이를 계승하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미국 단극 질서 해체에서 미중 화해 질서 해체로 이어져 현재 동서 냉전 질서로 역진 중이다. 미국의 유라시아 심장지대에 대한 지정학적 포위망 구축 및 지경학적 디커플링 전략 사이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동맹국들은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로 인한 군사안보 및 경제안보 차원의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둘러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전략 구상에서 동맹국 미국의 대전략 전환에 비추어 ‘중국으로의 편승’이라는 국가전략은 그 선택지에서 사실상 소멸했다. 과거 정부가 추구한 ‘미중 사이 위험분산’ 국가전략을 유지할 것인지 혹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통한 균형’ 국가전략으로 이행할 것인지가 선택지에 존재한다.

지정학 및 지경학 시각에서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통한 균형’ 국가전략은 군사안보 및 경제안보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경계 수준을 높이고 일본과의 협력 수준을 높이는 정책적 함의를 갖는다. 그 결과 한·미·일 안보-경제 협력 대 북·중·러 안보-경제 협력 대립 구도의 강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새 정부가 한일관계를 둘러싼 국민 여론의 양가성에 주목하여 그 정치적 위험을 줄이고 안보적 협력을 확대하는 국가전략 구상을 제시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김 정 북한대학원대학교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