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92022.07.

산방산

우리고장 평화의 길

한라에서 백두까지 부는 평화 바람
제주 ‘평화바람길’

제주 올레10코스는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을 지나 사계해변과 송악산으로 이어진다. 해안 길을 따라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제주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올레10코스는 제주 올레길을 찾은 1,000만 명의 탐방객들이 꼽는 ‘다시 오고 싶은 길’이다. 최근 이 길이 ‘다크투어리즘’(역사교훈여행)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 길에서 제주의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는 알뜨르 비행장 일대의 일제 강점기 유적과 제주 4·3 사건의 유적지가 잊지 말아야 할 그날의 비극을 대변하고 있다.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평화바람길’은 민주평통 서귀포시협의회가 지난 2021년 3월 (사)제주올레의 협조를 얻어 섯알오름과 알뜨르 비행장을 잇는 길에 평화의 염원을 담아 조성한 길이다. 송악산 주차장 서북쪽으로 있는 나지막한 오름의 끝자락에는 ‘평화의 바람 길’ 표지판이 탐방객을 반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잔디밭 길을 따라 오름을 올라가면 아득하게 보이는 한라산과 그 앞에 있는 산방산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다. 이와 함께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의 데칼코마니와 형제섬의 조화는 평화바람길을 잇는 해안선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게 만든다.

오름 능선의 조그마한 오솔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서면 움푹 팬 원형 콘크리트 구조물이 보인다. 구조물을 기준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송악산이, 오른쪽으로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그 옆으로 보이는 넓은 서쪽 평지는 이곳이 활주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평화바람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

한라에서 백두까지 평화가 이어지길 바라며
민주평통 서귀포시협의회가 조성한 ‘평화바람길’

원형 콘크리트 구조물은 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고사포진지의 흔적이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의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고사포진지는 알뜨르 비행장의 비행기들과 시설을 파괴하려는 적군의 항공기를 격추하고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대공포로, 1945년 무렵 지어졌다. 이는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으려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이다. 2기는 완공된 형태이고 3기는 미완공 상태다.

고사포진지터가 있는 곳은 ‘가운데 오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셋알오름의 정상이다. 오름 아래로는 미로처럼 생긴 동굴진지가 있는데 이 동굴은 제주에서 가장 긴 동굴로 군 지휘부, 통신시설, 탄약고 등을 위해 일본군이 만든 인공동굴이다.
제주 4·3 사건의 슬픔을 간직한 섯알오름
올레길을 따라 10분 정도 걷다 보면 푹 꺼진 곳에 콘크리트 웅덩이 두 개가 나타난다. 푹 꺼진 곳은 서쪽에 있는 알오름이라는 뜻의 섯알오름인데 일제 강점기에 탄약고로 쓰이던 곳을 미군이 폭파하면서 오름 형태가 무너져 내린 곳이다.

섯알오름은 제주 4·3 사건의 초토화작전이 마무리되면서 대규모 인명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지역에 예비검속령이 발동됐고,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각 경찰서는 4·3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1950년 음력 7월 7일 새벽, 모슬포지역 149명, 한림지역 62명의 사람들은 아무런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이곳에서 군인들에 의해 비밀리에 총살됐다. 시신 수습도 하지 못하게 해 가족들은 백골이 되어 뒤엉킨 시신을 6년 만에야 수습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정비가 되어 있지만 콘크리트와 철근 더미, 유족들이 찾아서 모아 놓은 총알은 그날의 비통함을 보여준다.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은 2007년에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희생자로 결정됐고 대법원에서 배상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제주지역회의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설치한 ‘한라에서 백두를 잇다 평화석’

제주 4·3 사건의 아픔을 간직한 섯알오름 학살 터

극동지역의 요충지 제주와 알뜨르 비행장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곳으로 나오면 알뜨르 비행장이 있다. 산방산 서쪽 평지에 조성된 알뜨르 비행장은 ‘아래쪽 들판’이라는 뜻의 제주어이다. 현재는 국방부 소유로 농민들이 임대해 감자, 무 농사 등을 짓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알뜨르 비행장은 20개의 비행기 격납고, 급수탑, 지하벙커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중요한 군사시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알뜨르 비행장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1차 공사가 진행돼 18만 평 규모로 완공됐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난징을 폭격하기 위한 중간 거점인 제주도의 지리적 중요성이 확대되자 일본은 알뜨르 비행장 부지를 40만 평으로 확장했고, 이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약 80만 평으로 더욱 확장됐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은 일본 본토 방어 전략에 따라 미군이 상륙 가능한 노선을 예상하고 방어하는 ‘결호작전’을 세웠다. ‘결호작전’은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 일본 본토로 진격하는 것을 대비하고자 계획한 일본의 제주도 방어 전략이다. 이 전략에 따라 제주도 곳곳이 요새화됐다. 일본은 해안선에 인공동굴을 파고 개인 잠수정을 숨겨 두었다가 미군 함정이 해안선으로 다가오면 자살특공대를 투입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미군 상륙 이전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해당 전략은 실행되지 못했다.

고사포진지는 당시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알뜨르 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알뜨르 비행장의 모습 ⓒ서귀포시청


당시 제주도민들은 알뜨르 비행장 일대에 산재해 있는 각종 군사시설과 인공동굴 건설에 강제 동원됐다. 젊은 사람들은 이미 강제징용, 학병 등으로 차출된 상황이라 부녀자뿐만 아니라 노인까지 건설에 동원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며 벌였던 전투에서 2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미루어 볼 때 만약 제주에서 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면 제주도민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일제의 항복으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송악산을 거쳐 알뜨르 비행장에 이르는 ‘평화바람길’을 걸으면 평소에 잊고 지내던 평화·통일에 대한 간절함이 저절로 생겨난다. 한반도 남단에서 일으킨 평화의 바람이 남도의 해안선을 넘고 휴전선을 넘어 백두산까지 훈풍으로 불어가길 기원한다.

양 성 주 민주평통 서귀포시협의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