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르포
내가 만난 생생 통일 현장
“평화통일 현장에는 무언가가 있다”
한국전쟁 72주년을 엿새 앞두고 있던 6월 19일 일요일 아침, 필자는 경남 통영 앞바다에 있었다. 통영항에서 한 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한산도를 지나면 나타나는 조그마한 섬 용호도. 4년 전 용초도에서 이름이 바뀐 섬이다. 용호도의 용초마을 선착장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허름한 팻말 하나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6·25라는 글자와 함께 용초 포로수용소의 유적을 안내하는 지도다. 매주 토요일 아침 방송되는 MBC 장수 프로그램 ‘통일전망대’에서 ‘생생 통일현장’ 코너를 2년 가까이 맡고 있는 필자가 6월 25일용 방송 촬영을 위해 이곳을 찾은 이유다.
평화·통일의 역사와 흔적을 따라 걷다
한국전쟁 당시 포화상태였던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친공-반공 포로 간 갈등과 폭동이 끊이지 않자 북한인민군 출신의 친공 포로 8천여 명이 꼭 70년 전이었던 1952년 6월 19일 용초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휴전 이후 이뤄진 포로 교환으로 남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8천여 명이 사상검증 등을 위해 이곳에 인민군 대신 8개월간 수용된다. 그동안 묻히고 잊혀졌다가 최근에서야 복원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이 섬에서 우리의 아픈 역사가 남긴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평화의 중요성과 통일의 필요성을 다시금 되새겨봤다. 관련 내용은 토요일이었던 6월 25일 한국전쟁 72주년에 방송됐다.
2020년 10월부터 매주 한 곳씩 평화와 통일의 의미가 담긴 현장을 찾아다니며 느낀 건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크고 작은 노력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었다. 남북관계와 정부의 성격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분단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는 평화 그리고 통일은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의 삶에 어느 정도 녹아들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평화와 통일에 대해 일반인 수준의 관심만 있었던 필자는 그래서 그 현장들로부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또 배울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지난해 2월, 2주 연속 ‘평화의 소’를 추적했던 일이다. 24년 전이었던 1997년 1월 17일 북한에서 홍수로 떠내려오다 비무장지대 섬, 유도에 고립됐던 황소를 우리 해병대원들이 구출해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의 해를 맞은 지난해 그 소는 이후 어떻게 됐고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이를 추적해 보기로 한 것이다.
수소문 끝에 과거 구출작전을 벌였던 김포에 ‘평화의 소’ 유골이 보관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평화의 소’의 후손, 그러니까 5세와 6세를 김포의 한 축산농가에서 찾을 수 있었다. ‘평화의 소’는 제주 출신 암소와 짝짓기 해 새끼들을 낳았는데 새천년을 맞아 엄마 고향인 제주로 보내진 그 새끼의 후손들도 찾을 수 있었다. 제주 우도의 한 축산농가에서 공교롭게도 김포 농가에서처럼 ‘평화의 소’ 5세와 6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취재 이후 1년 반 정도 지난 지금은 또 다른 후손들이 태어났을 수도 있겠다. 사실 오래전 사건이고 그리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향후 남북을 연결해 줄 하나의 의미 있는 사건으로 계속해서 기억해 주면 어떨까 싶다.
올해 1월 첫 방송에서는 새해를 맞아 특별한 기획을 시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휴전선과 혼동하고 있는 38선을 따라가 보는 콘셉트였다. 강원도 수복지역을 중심으로 남한 곳곳엔 38선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또한 잊히고 묻힌 게 현실이었다. 취재는 1950년 10월 1일 국군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곳인 강원도 양양의 38선 표지석에서 시작됐다. 38선 표지석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38평화마을이라 불리는 양양의 잔교리 마을이 나타난다. 이후 38선은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을 지나 인제 38공원을 만나게 되고 소양강을 거쳐 춘천으로 넘어간다. 춘천에선 38선이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갔지만 지금은 수몰돼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모진교의 흔적을 찾고 이후 포천의 38선고개, 연천의 38선 돌파기념비 그리고 경순왕릉까지. 38선의 흔적은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여전히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경순왕릉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비무장지대를 만나게 되는 38선.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개성 송악산과 백령도 북쪽을 지나 서해로 흐르게 된다. 취재 현장에서 휴전선과 38선을 여전히 혼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제 그 흔적들 또한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는 모습에 아쉬움이 남는다.
제주 우도에서 찾은 ‘평화의 소’ 5세
인제 38공원에 세워진 ‘Let’s go 38선’ 상징조형물 ⓒ인제군청
크고 작은 노력으로 만들어진 평화통일 현장
전국 방방곡곡에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는 현장이 산재해 있었다. 지난해 경남 거제도에선 흥남철수 70년을 맞아 주민들이 과거 피난민 마을에 당시의 역사적 모습을 그린 것을 소개했고, 8·15 광복절에는 시민들과 함께 소형 비행기에 올라 독도 상공을 선회비행하며 평화의 의미를 찾아보기도 했다. 또 한반도의 정중앙이라는 강원도 양구에서는 한반도 모양의 섬 전역을 돌아보는 특별한 경험도 가졌다.
실향민과 이산가족 그리고 북한이탈주민은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평화와 통일의 현장이다. 황해도 피난민들이 정착해 삶을 일궈온 섬,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서는 지금도 1960~1970년대 모습이 그대로인 대룡시장을 다녀오기도 했고 함경도 피난민들의 터전이었던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실향민 축제를 만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생소한 직업인 버스 기사, 골프 캐디 등에 도전하거나 공무원, 의사, 한의사 같은 전문직에 진출하며 성공적인 남한정착 스토리를 쓰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민주평통과 통일부 등이 마련해 온 여러 행사도 뜻깊은 평화통일의 현장이었다. 통일부가 매년 말에 개최하는 ‘통일로가요’에서는 젊은 뮤지션들이 만들어 내는 통일을 향한 하모니를 즐길 수 있었고, 민주평통이 전북 전주에서 9년째 개최하고 있는 ‘청소년 통일 댄스 퍼포먼스 대회’와 전남 목포에서 열린 ‘청소년 평화통일 랩 경연대회’ 등을 통해서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어린 학생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올해는 특히 남북 대화와 통일교육이 시작된 지 반세기가 된 해여서 이와 관련한 기획물을 방송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필자가 평화와 통일 이야기가 담긴 현장들을 찾아 다니며 방송한다고 하면 가까운 지인들이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뭐가 있긴 있어?” 이런 질문이 무색하게 우리 주변에는 숨은 평화통일 현장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장들이 유지되기 위해 크고 작은 노력들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 현장들을 좀 더 의미 있게 키워나가기 위해 ‘방송쟁이’ 한 명의 발걸음도 그곳에 살포시 얹어본다.
‘2020 통일로가요’ 결선대회 모습(2020.11.14.)
제4회 ‘전국 청소년 평화통일 랩 경연대회’ 모습(2021.10.16.)
이 상 현
MBC 통일방송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