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평화
분단의 소재주의를 넘어서
‘헌트’, ‘육사오’, ‘공조 2’ 흥행이 남긴 것들
‘헌트’, ‘육사오’, ‘공조 2: 인터내셔날’(이하 ‘공조 2’). 올해 한국 영화의 하반기 흥행을 책임진 세 편의 영화는 모두 분단을 소재로 하고 있다. ‘헌트’는 냉전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인 1980년대를 배경으로 국가 정보 요원들의 권력 다툼, 대통령 암살을 둘러싼 음모를 다뤘다. 북한이 명시적인 카운터파트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북한의 조종을 받는 간첩의 존재나 이웅평 귀순 사건, 아웅산 테러 사건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영화 속에 녹여냈다. 정치권력의 핵심부를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헌트’는 ‘강철비’ 1, 2편(2017, 2020), ‘공작’(2018), ‘모가디슈’(2021)의 계보를 잇는다.
반면, ‘육사오’는 복권 당첨 쪽지가 철책선을 넘어 북한으로 날아간 상황에서 생긴 황당한 사건들을 재미있게 풀어낸 코미디다. ‘육사오’의 계보는 ‘간첩 리철진’(1999)에서 시작해 ‘휘파람 공주’(2002), ‘남남북녀’(2003), ‘동해물과 백두산이’(2003), ‘간 큰 가족’(2005) 등 분단 소재를 연성화·희화화한 영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공조 2’는 대략 이 둘 사이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전편의 남북 형사 간 우정과 연대의 기조를 이어가면서 한국계 미국 FBI 요원까지 가세시켜 ‘헌트’처럼 엄중하지도 ‘육사오’처럼 가볍게 풀어내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공조 2’는 남북한 요원들의 우정을 그린 ‘의형제’(2010)나 북한 요원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 ‘베를린’(2012),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용의자’(이상 2013), ‘백두산’(2019)의 계보에 놓을 수 있다. 다만 그 톤은 훨씬 가벼워졌는데 이는 ‘공조 1’보다 ‘공조 2’에서 더 두드러진 현상이다.
반공 영화에서 분단 영화까지
사실 분단 영화만큼 대북기조의 영향을 받는 장르도 없다. 탈냉전 시대를 사는 지금이야 분단 영화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조상은 반공 영화다. 냉전시대 대한민국에서 반공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능하게 했던, 적대와 동원의 최전선이었다. 반공적인 영화야 미국, 대만 등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소위 ‘자유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은 한국이 유일했다. 국가(문화공보부)가 주관하는 대종상에는 반공 영화 작품상과 반공 영화 각본상이 따로 있을 정도였고 정부 주도로 반공 영화 시나리오 공모도 시행되곤 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 이후 탈냉전과 민주화라는 국내외적 격변에 직면해 시대에 걸맞게 바뀌기 시작했다. ‘길소뜸’(1986), ‘남부군’(1990), ‘태백산맥’(1994) 등 탈냉전을 지향하는 분단 영화들이 출현한 것이다. 이러한 영화가 작가주의에 기초한 리얼리즘 영화였다면 보다 대중적이고 장르 친화적인 영화는 ‘쉬리’(1999) 이후의 영화였다. 특히 ‘공동경비구역 JSA’(2000), ‘웰컴 투 동막골’(2005)은 ‘쉬리’와 함께 21세기 한국의 분단 영화에서 하나의 전범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과 북이 대립하는 첩보영화로서의 ‘쉬리’, 분단의 경계를 확정하고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월경(越境)을 행하는 ‘공동경비구역 JSA’, 하나의 유토피아적 공간을 상상하여 적대의 시간을 강화(講和)의 시간으로 돌려놓는 ‘웰컴 투 동막골’.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분단 영화들은 이 세 편의 자장 안에서 진자 운동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영화에서 남자들 간의 우정과 연대는 하나의 중심 기조처럼 자리 잡았다. ‘강철비’ 1, 2편처럼 국가 권력의 핵심부를 다룬 영화나 ‘공조’ 1, 2편처럼 일선 형사를 다룬 영화, ‘육사오’처럼 말단 부대의 초급 장병들을 다룬 영화들 모두의 공통된 특징이다.
국가권력의 핵심부를 다룬 영화에서 적대와 화해의 분위기는 영화 밖 실제 남북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강철비 2: 정상회담’(2020)은 남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유례없이 좋았던 2018~2019년의 상황이 반영됐다. 다만 이 영화는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개봉 적기를 놓치고 말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덜 휩쓸리게 하는 한 방법은 ‘공작’이나 ‘모가디슈’, ‘헌트’처럼 과거로 시계를 돌려놓거나 ‘공조’ 1, 2편, ‘육사오’처럼 분단을 철저하게 장르의 외피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특히 ‘공조 2’나 ‘육사오’는 2019년 하노이 회담과 판문점 회담 이후 악화된 남북·북미관계를 배경으로 제작된 분단 영화라는 점에서 더 주목을 요한다. 적어도 동시대를 배경으로 권력의 핵심부를 보여주는 영화는 정치적·상업적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육사오’는 남북 청년들의 치기 어린 우정이 엄혹한 분단 현실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는 ‘공동경비구역 JSA’와는 달리 누구도 죽지 않고, 누구도 감옥에 가지 않은 채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공조 2’는 북한 형사의 슬픈 가족사를 양념처럼 첨가했던 ‘공조 1’과 달리 북한의 흔적을 거의 지워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주는 듯하다. 첫째, 적어도 대중 영화에서 북한은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곁에 와 있는 친구라는 것. 둘째, 대중 영화가 분단을 단지 장르의 외피처럼 활용하면 할수록 북한은 손에 잡히지 않는 유령처럼 허망한 존재가 된다는 것. 이 모순을 지양하는 방법은 지난한 과정임에도 영화 바깥에서 적대의 장벽을 걷어내고 평화와 공존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으로 만들어내는 것일 것이다.
정 영 권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