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52022.03.

지난해 11월 14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합의 폐기를 위한 집회가 열렸다. ⓒ연합

국제

일본 기시다 총리의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와 한일관계

일본은 지난해 10월 새로운 총리가 취임했고 한국은 올해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양국의 리더십 교체가 얼어붙은 한일관계를 녹일 변곡점이 될 수 있을지 전망한다.

아시아 패러독스(Asia Paradox), 정랭경열(政冷經熱)은 과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이었다. 아시아 패러독스는 활발한 경제적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갈등은 심화되는 아시아 특유의 역설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고, 정랭경열은 정치적 갈등이 경제 영역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 활발한 경제협력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분석하는 데 이러한 설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최저점 찍은 한일관계, 기시다 내각의 정책노선은?
이것의 대표적 사례가 한일관계이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관계는 지속적인 부침을 보여 왔지만 최근 몇 년의 갈등 양상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역사 논쟁, 안보 갈등, 무역 보복 등으로 이어지는 복합적 갈등이 발생했고 이는 전례 없는 경제 협력 위축으로 이어져 결국 양국 관계는 수십 년 만에 최저점을 찍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부정의(不正義)는 양국의 외교·사법·정치의 영역을 지배하며 양국의 ‘현재’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즉 2022년의 한일 역사 갈등은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고, 양국의 외교 문제이며, 한국의 사법 문제이자, 일본의 정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최악’이라고 표현되는 한일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 전문가들이 그 방안으로 리더십의 교체를 기대하던 중 지난해 10월 4일, 제100대 일본 총리로 기시다 후미오가 취임했다. 기시다 총리는 자민당의 7개 파벌 중 평화주의를 내건 온건파 고치카이(宏池.)를 이끄는 비둘기파로 알려져 왔기에 9년간의 아베 내각과 이를 계승한 스가 내각과의 정책적 차별성에 기대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시다 총리의 정책 노선은 지난 아베 정권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현재 양국 사이 최대 현안으로 꼽히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한국 정부의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등 기존의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시다 총리는 현실을 직시한다는 의미에서 이른바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를 주창하며 미일동맹의 억지력과 대처력 강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는 지난해 12월 요미우리 국제경제간담회(YIES) 강연에서 처음 발표된 이후, 2022년 1월 1일 연두 소감에서 언급됐고, 그리고 1월 17일 개원한 정기국회 시정방침 연설에 포함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기시다 내각의 외교·안보 슬로건으로 자리 잡았다.

기시다 총리가 팬데믹 극복,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과 함께 강조한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는 ‘심각하고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와 안보의 정밀한 조정과 민주주의, 인권 등 보편적 가치의 중시를 골자로 한다. 특히 중국에 대해 할 말은 하면서 대화는 이어가는 현실적인 대중국 외교 방침을 시사하고 있다. 기존 자민당 보수파 의원들이 중국에 강경한 대응을 요구해 온것에 반해 기시다 내각은 경제 협력의 실익을 포함한 현실적인 외교로 균형과 실익을 챙기겠다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일본을 둘러싼 남·북·미 안보 이슈
현실적인 외교를 추구하겠다는 기시다 내각의 방향을 고려했을 때 한일관계의 개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한일관계에 대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는 있지만 이는 오는 7월에 있을 참의원 선거를 고려한 것일 수 있다. 더욱이 한국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국내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선거를 앞두고 타협적 외교 행보를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해결되지 않는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징용 과거사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한일관계.
양국 리더십의 교체로 양국 화해의 물꼬가 트일지 주목된다. ⓒ연합

과거 독일이 유럽에서 주변국과의 화해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도 정치적 결단과 리더십이 중요 변수로 작용했다. 그러나 현재 한일 양국의 국내정치는 과감한 리더십을 가지고 외교정책을 추진하기에 적절한 환경이 아니다. 일본 참의원 선거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기시다 내각의 리더십이 안정기에 접어든다면 새로운 움직임이 감지될 여지가 있다. 특히 한국 대통령 선거를 모멘텀 삼아 양국의 새 리더십이 보다 우호적으로 정책을 조율할 가능성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 입장에서는 미국의 입장과 영향력 역시 고려 대상이다.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 이전부터 일본 외교정책의 첫 번째 축은 늘 미일동맹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대북정책과 인도·태평양 정책의 핵심 요소로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아베 재임 시기에 한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됨으로써 한·미·일 3국 협력 역시 악화됐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는 ‘인도·태평양의 약속’이란 제목의 전략 문건을 발표하며 인도·태평양전략을 구체화했다. 문건은 한·미·일 3국 협력 확대를 10대 핵심 과제 중 하나로 꼽으며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한일관계의 회복이 한국과 일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도 동아시아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 안보 이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장기화될수록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이 커질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이처럼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의 압력을 일본이 마냥 버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즉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일본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이는 시나리오를 조심스럽게 예상해 볼 수 있다.

한편 기시다 내각의 대북정책은 기존 미일공조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가장 중요한 과제’라 칭하며 납치 피해자들의 무사 송환을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며 이를 위해 조건 없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직접 만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를 두고 대북정책에 변화의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분석도 있으나 이는 아직 시기상조로 보인다.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규탄,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포함한 일본의 방위력 강화 노력 등이 미일동맹이라는 우산 아래 추진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대북정책은 독자적으로 고안 및 실행되기보다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협조하는 형태로 구현될 가능성이 더 클 것으로 전망된다.
한일관계의 ‘모델’, 찾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야
국제정치에서 국가들은 힘과 국익에 우선하여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책 결정의 프로세스를 들여다보면 감정, 역사적 기억, 트라우마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인식의 영역에 영향을 받고 있다. 관찰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 적대관계에 있던 두 국가가 화해를 이루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상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사과와 반성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은 어느 세대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인지 등 해결하고 합의해야 하는 많은 이슈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독일은 했지만 일본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교하며 비판하기도 하고, 이를 근거로 유럽의 화해와 통합을 이상적인 지향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화해를 이루었던 지난한 과정은 보지 않고 유럽 통합이라는 결과물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화해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하려는 관계에 특정 결과물을 끼워 맞추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지금 한일관계에 필요한 것은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지역의 ‘모델’이 아닌 한국과 일본이 만들어 가고 써 내려가야 하는 새로운 역사인 것이다.

미중경쟁으로 한·미·일 협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미국의 압력으로 일본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일 시나리오도 예측해 볼 수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4일 기시다 총리를 예방한 이매뉴얼 신임 주일 미국대사 ⓒ연합

끝으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의 모습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시점이다.

이는 곧 화해의 방법론과 직결되는 것으로 과거의 부정의를 처벌로 다스릴 것인지, 용서로 다스릴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혹자는 다시는 반복할 수 없도록 강한 처벌과 배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혹자는 관계를 회복하는 치유의 과정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국가 간 관계를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 한 가지 방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과정을 통해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기도 하고, 용서와 회복의 과정에서 처벌이 발생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징벌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가 모두 충족됐을 경우에 과거의 부정의가 정화(淨化)될 수 있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관계를 개선할 수 없으며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만 생각하자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다. 결국 화해는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긴 과정이기 때문이다.

천 자 현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