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52022.03.

진단

혐오에 저항하는
우리의 자세

분단구조가 투영되어 있는 우리 사회 속 혐오와 차별에 대해 분석한다.

혐오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한다. 수년간 곳곳에서 혐오를 말했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 계급, 지역, 이념, 인종, 민족, 정체성 등을 가리지 않고 경계를 긋고, 상대편을 비하하고, 적대하다 못해 급기야 혐오한다. ‘내 편’이라는 개념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조금이라도 차이가 발견되면 다시금 그(녀)를 낙인찍고 비난한다. 곳곳이 전쟁터이며, 모두 지목당하지 않으려고 잔뜩 웅크리고 있다. 도대체 문제 동인인 혐오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며, 어떠한 이유로 이토록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일까?
완결해야 하는 대상의 경계를 넘나들 때 나타나는 혐오
많은 철학자들은 혐오를 원초적 정동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상쇄하기 위한 방어 심리적 기제의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존재적 불안이나 현실적 문제를 특정한 집단, 개인 등에 투영하여 혐오함으로써 잠시나마 안정감을 구축하려는 감정이 혐오를 가능하게 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나 명확한 구획 밖의 존재가 혐오의 대상이 돼 온 것은 바로 인간의 완결성 추구라는 욕망에 틈새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 내부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피부 밖을 타고 흐르는 타액, 생리혈, 토사물 등이 혐오스러운 이유는 완결해야만 하는 인간 몸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도 비슷하다. 순결한 민족이나 인종을 추구하는 집단에서 난민, 이주민, 혼혈인, 성소수자 등을 ‘오염된 존재’로 낙인찍은 사례는 완전에 다다르고자 하는 사회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다. 정치 철학자인 마사너스바움은 혐오가 문제적인 이유를 그 사회가 추구하고자 하는 순결성의 경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예컨대 여성이나 성소수자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이는 결국 그 사회가 얼마나 가부장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혐오스러운 것을 낙인찍고 유폐함으로써 마치 순결하고 완전한 사회가 가능할 것과 같은 환상을 만들어 내지만, 사실 혐오의 대상이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명명되는 것은 이미 그 사회의 일부분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혐오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그리고 어떤 성격과 이유에서 특정 집단을 낙인찍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혐오스러운 ‘타자’로 명명되는 집단과 혐오스러운 성향과 특징으로 지목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가 집착하는 (허구의)완전성이 무엇인지를 증언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분단이 낳은 혐오 밈(meme)의 빠른 전염성
한국 사회에서 지목된 혐오의 대상은 다른 여느 사회와 큰 차이가 없다. 여성, 장애인, 난민, 이주자, 성소수자 등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집단이 혐오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로 인한 사회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발화하는 매체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개인 미디어’ 시대에 혐오 발언이 쉽게 반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도 일정 부분 역할을 수행한다. 다만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특징은 혐오의 정동이 분단 및 이념 갈등과 결합되고 있다는 데 있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까지 뒤섞여 더욱 증폭되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유력 경제인의 소셜미디어에 업로드된 메시지가 정치권을 휩쓸고 급기야는 소비자 불매운동과 소비운동을 동시에 이끌어 냈던 사건이 있다. 무려 70여 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유력 기업인은 2021년 11월경부터 여러 차례 ‘공산당이 싫어요’, ‘난 콩 상당히 싫다’ 등의 메시지를 올리면서 논란을 촉발하였다. 흥미롭게도 그의 소셜미디어는 재벌가의 부유한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이라는 존재는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부유한 삶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가 즐기는 음식, 와인, 옷 등의 이미지는 온라인을 통해서 빠르게 퍼져 소비자의 반향을 일으키곤 했다. 유력 기업인의 소셜미디어는 신자유주의적 소비 사회에서 재벌 총수가 소비의 트렌드를 이끄는 아이콘으로 재위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가 표방하는 소비주의와 경제주의를 긍정적 삶의 양식으로 재의미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모두가 선망하는 삶을 사는 재벌의 갑작스러운 정치 발언이 만들어 낸 파장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힙’한 재벌 총수가 ‘공산당이 싫다’는 너무나 오래된 혐오를 들춰냈다는 것도 의외였다. 하지만 평소에 ‘고급스러운 취향’에 매료된 이들은 그의 혐오 발언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것에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멸공*’과 같은 혐오 발언이 평소 그의 이미지와 겹쳐 ‘힙’한 메시지로 둔갑하기까지 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반중 정서가 상당한 상황에서 그가 업로드한 ‘시진핑’ 주석의 사진과 비판 기사는 마치 거대한 중국에도 할 말을 하는 용감한 인플루언서로 이해되기까지 했다.

*멸공: 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자를 멸함을 뜻한다.



지난해 7월 5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시민들이 집단 폭행을 당해 숨진
동성애자 남성 사무엘 루이스(24) 사건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

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라고 하더라도, 그가 지속적으로 ‘멸공’, ‘승공통일’, ‘반공방첩’ 등의 해시태그를 올린 것이나 “나의 멸공은 오로지 우리 위에 사는 애들에 대한 것”이라고 명시한 것 등은 분단 정서와 냉전 이데올로기를 자극하는 언설이 분명하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의 혐오 발언이 정치인들에 의해서 증폭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혐오 감정과 결합되어 확산된다는 데 있다. 사회 지도층이 조장하는 혐오 선동에 온라인 커뮤니티 또한 들썩거렸다. 갑작스레 등장한 ‘멸공’은 ‘징병제’ 논란과 결합했다. ‘미필자’인 여성을 향한 차별적 시선이 더욱 맹위를 떨치기까지 했다.

혐오가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것의 전염성 때문이다. 그것이 ‘장난’이 되었건, ‘놀이’가 되었건 혐오의 감정이 실린 언설은 주변에 빠르게 전파된다. 누군가를 ‘절멸’하겠다는 것은 인간성을 포기하겠다는 뜻이기에 쉽사리 입을 떼기 어렵지만, 자신이 추종하는 ‘힙’한 사람이, 존경하는 정치인이, 닮고 싶은 경제인과 지식인이 발화한다면 갑작스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혐오 발언은 더욱 노골적이고 폭력적으로 진화한다. 주목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개인 미디어의 시대, 나르시시즘의 극단화된 현대 문명에서 선정주의적 이미지와 발화가 더 쉽게 유통되고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윤리적 태도와 의식 선행이 뒷받침되어야
한동안 ‘미러링(mirroring)’이 혐오에 대항하는 정치적 전략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혐오 대상 집단이 발화자에게 혐오로 되갚아 주자는 취지였다. 지금까지 숨죽였던 이들의 마지막 저항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었고, 고도의 정치적 전략으로 메시지 속의 전복 가능성에 환호했던 연구자도 있었다. 하지만 ‘미러링’이 만들어 낸 상처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혐오를 혐오로 되갚아 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혐오가 만들어졌고, 저항하고자 차용한 혐오의 언어는 다시금 발화자에게 되돌아와 더 큰 상처를 만들었다. 혐오 발언을 전유, 전복, 재맥락화하는 것은 의미 있는 전략일 수 있지만, 모두를 향한 혐오 발언의 무한 증식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혐오에 대항하기 위한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물론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규제가 결국 또 다른 권력의 작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지만, 적어도 혐오를 조장하는 불온한 세력을 위축시키는 효과는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규제와 규율만으로는 혐오의 문화를 완전히 해결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혐오가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으로 인한 불안을 약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투영한 원초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혐오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불안을 세밀하게 읽어냄으로써 좀 더 근원적인 해결책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전방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혐오 발화는 한반도를 둘러싼 불안정한 국제정치 환경,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자유주의 세력의 불안감 증대, 팬데믹 이후에 가중된 부의 편중, 급격한 기술 발전에 따른 문화 지체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다시 말해 혐오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불안의 근원을 드러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시민·언론단체 회원들이 1월 20일 오후 구글코리아가 입주한 서울 강남구 강남파이낸스센터 앞에서
혐오·차별을 조장하는 유튜브 채널의 규제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불안이 투영된 혐오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갈등과 문제를 만들어 낼 뿐이며, 이 세계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혐오 발화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증오하는 것의 이면에 어떤 불안이 작동하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혐오 선동에 휘둘리지 않을 윤리적 태도와 의식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낯선 모습으로 존재하는 타자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혼란의 시대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타자를 비하하면서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몇몇의 소수는 희망을 얘기하기도 한다. 비관에 빠져있기보다는 주변과 손잡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지금껏 인류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소수가 나서서 인간성을 지켜내며 주변과 연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이 혐오를 이길 것이다.

김 성 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