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평화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2011년 12월 14일 한국 일본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처음 서게 된 이유는 20년간 지속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1,000회의 수요시위를 기리고, 반복되어서는 안 될 전쟁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반성하기 위함이다. 10주년을 맞은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만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반성과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9년 아이치 트리엔날레 국제 미술전에서 평화의 소녀의 상 앞에 무릎을 꿇은 남성
바람이 깃든 평화의 소녀상
일제강점기, 일본은 자국 군인의 관리를 위해 ‘위안부’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식민지인 조선의 여성에게 돌아갔다. 1991년 일본 정부가 역사적 사실을 밝히라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요구를 거부하자 김학순 할머니는 최초로 자신이 당사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 후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가 열렸다.
비바람, 눈보라, 무더위, 뼛속까지 사무치는 추위에도 할머니들은 20년이 넘게 “일본정부는 사과하라!”라고 외쳤다. 우리가 이를 목격한 것은 2011년 1월. 우연히 지나게 된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를 보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함께하겠다는 생각에 정대협을 찾았다. 때마침 정대협에서는 1,000차 수요집회를 앞두고 ‘평화비’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작은 비석이나 상징물의 디자인을 준비하게 됐다.
작업에 착수한 어느 날,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평화비건립에 대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이는 조각가로서 더 적극적인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전 세계 아이들에게 본인이 겪었던 고통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자리에 섰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오롯이 평화의 소녀상에 담았다. 또 이 작품을 통해 할머니들이 바라는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이루어지길, 이 세상 소녀들과 약자들이 더 이상 전쟁과 차별로 인해 아파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했다. 그렇게 일본대사관을 바라보는 평화의 소녀상은 여린 소녀지만 약하지 않고, 슬프고 화나지만 의연하고 단호하다. 일본 정부를 향해 태평양전쟁(1932~1945년) 시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 사과,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추모비 건립, 일본 학생들에 대한 역사 교육 등을 요구해 오고 있었다.
제막 당일, 누군가가 소녀의 발이 시릴까 본인의 목도리로 발을 감싸주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은 추울 때는 모자, 망토, 목도리, 신발 등의 옷가지를, 비가 올 때는 우산과 우비를, 명절에는 설빔과 세뱃돈을 전했다. 이외에도 평화의 소녀상 앞에는 편지와 사탕, 과자, 인형, 꽃다발, 목걸이 등이 놓였으며,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 후에는 두통약이 놓여 있었다.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하며 이 소녀가 우리의 친구, 가족 혹은 ‘나’처럼 느껴지길 바랐는데, 그 희망은 현실이 됐다.
2021년 독일 뮌헨에 전시된 평화의 소녀상의 뒷모습. 전시관 실무자들은 전시에 반대하는 수백 통의 문자와 전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역사를 올바로 기억하기 위한 또 다른 시작
2011년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기록으로서의 마침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다. 아베 정권의 역사 왜곡과 진실 부정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려는 의지를 모으는 계기가 됐다. 10년이 지난 지금 평화의 소녀상은 82곳에 세워졌다. 다른 작가가 만든 평화의 소녀상도 수십 곳에 세워졌으며, 미국 글렌데일시를 시작으로 미국, 독일, 캐나다, 중국, 필리핀, 호주 등 해외 16곳에 세워졌다.
이 과정은 지금도 결코 순탄치 않다. 철거를 요구하는 일본정부와 극우 세력들의 압력과 회유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법정 소송을 해야 했던 미국 글렌데일시의 평화의 소녀상은 물론이고 독일의 레겐스부르크에서는 비문이 사라졌으며, 독일 미테구의 평화의 소녀상도 영구 설치되지 못하고 1년마다 연장해야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필리핀에서는 하루 만에 철거당해 창고에 놓인 신세가 됐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평화인권에 대한 의지를 보이며 일본과 독일, 미국에서의 전시를 만들어 냈고,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연대하고 있다.
2019년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 국제 미술전에 초대됐다. 많은 일본인들이 관람했고 반응은 감동적이었다. “말로만 듣던 반일 조각상이 아니네요!”,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은 평화의 소녀상이 반일 조각상이라며 전시 주최 측을 압박했고, 헤이트스피치들의 반대 시위와 폭파 예고 협박에 전시장은 폐쇄당했다가 전시가 끝나기 10일 전 재개했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 이후 평화의 소녀상 앞에 적힌 소녀상 철거 반대와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글이 눈에 띈다.
2021년 봄과 여름에도 독일 드레스덴과 뮌헨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 초대가 있었다. 당시 전시를 반대하는 문자와 전화가 수백 통이 왔고, 기획자와 큐레이터들은 협박 속에서 전시를 해야 했다. 이러한 일은 해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국내 평화의 소녀상도 망치로 맞거나 날카로운 것에 긁히고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연대하지 못하는 틈을 타 평화의 소녀상과 징용자상 철거를 외치는 시위가 더욱 극렬해지고 있다.
세계의 예술가들은 일본의 검열에 항의하는 뜻으로 SNS에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것은 한국 여성뿐만이 아니다”라며 ‘소녀상 되기’ 운동을 벌였다. 일본 5곳의 지역에서 전시를 기획했지만, 오사카에서만 온전히 전시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미국, 캐나다, 필리핀, 독일 심지어 한국에까지 세세하고 촘촘한 압력과 방해를 하고 있다. 단 하나의 조각 예술품일뿐인데 일본의 과도한 방해와 압력은 마치 일본이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케 한다.
2021년 평화의 소녀상이 생긴 지 10년. 그간의 활동은 많은 성과와 숙제를 남겼다. 그리고 2022년 새해와 대선을 맞아 우리는 역사적인 큰 획을 긋는 선택을 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숙고하며 연대하는 것이 할머니들의 뜻을 이어 평화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길임을 우리는 항상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를 꿈꿔본다.
김서경, 김운성
평화의 소녀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