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52022.03.

평화통일 현장

『대한민국 평화기행』
‘한반도 평화기행’을 희망하며

답사(踏査)란 공간에 쌓인 시간적 중층성과 삶의 총체로서의 문화의 복합성을 ‘현장에서’ 살피는 것이다. 때문에 현장(공간)을 직접 밟는 것이 전제가 되며, ‘내가 딛고 서 있는’ 현장에서 때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때로는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상상한다. 긴 역사 속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은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살피면서 나와 역사, 사회의 관계를 생각하며 기록한 글이 답사기(踏査記)·기행(紀行)이다.
평화기행은 곧 비평화 현장의 답사기
『대한민국 평화기행』은 저자들이 평화를 주제로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답사하고, 이야기로 기록한 책이다. 평화의 흔적이 담긴 각지를 찾아, 평화의 시선으로 곳곳을 다시 보도록 이끈다. 한국 역사에서 평화란 무엇이었으며, 앞으로 평화를 어떻게 만들어 갈지 질문을 던진다.

대한민국에는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 비평화의 역사가 서려 있음을 의미한다. 전쟁이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서울 개발과 건축에 반영됐던 때도 있다. 1960년대 말 ‘서울 요새화 계획’이 그 예이다. 현재도 하루 9만 6,000대 이상의 차량이 이용하는 남산 1·2호터널은 방공호 활용을 염두에 두고 구상된 것이다. 건축 당시 최고 주상복합 건물이었던 홍제동 유진상가도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대전차 장애물 구조처럼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의 평화 현장을 답사한 『대한민국 평화기행』

제국주의의 침탈과 저항의 역사도 비평화/평화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이자 인류 보편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지향한 독립운동을 공감하고 나누는 전시관’을 지향한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당대부터 있었다. 한용운은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와 함께해야 한다. 실로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이다”라고 언명했다. 독립운동은 민족적 차원만이 아닌 세계 보편적인 정의와 진정한 평화를 향한 실천이었다. 국립통일교육원이 자리한 북한산 순국선열·애국지사 묘역이나,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 전국에 산재한 독립운동가들의 생가 등도 일제강점기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저항의 보편적 가치와 의미를 일깨우는 곳이다.

부산도 평화의 현장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다. 부산은 한국전쟁 때 임시수도 역할을 했고 국제시장, 아미동 무덤마을, 당감동 아바이마을 등 피란민의 악전고투가 새겨진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유엔군의 유해가 안장된 ‘유엔기념공원’도 있다. 이곳에는 11개국 2,311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또한 부산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 벌어진 강제 동원의 참혹함과 인권 유린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파악된 강제동원 총수가 무려 782만 7,355명(중복 포함)인데 그 인력의 22%가량이 경상도 출신이었다. 국외 강제동원은 대부분 부산항을 거쳐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대’와 ‘기억’과 ‘거울’은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마주할 수 있다. 이처럼 부산은 전쟁과 삶, 인권, 평화라는 화두로 가득한 현장이다.
‘평화의 그릇’으로 바뀌고 있는 분단의 현장
남북 접경지역은 그 자체만으로도 ‘냉전사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분단과 비평화의 상처가 직접적이고 큰 곳이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전회(轉回)’가 요구되고 시도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박물관 조성을 통해 사라진 역사를 기억하려는 민북마을 사람들, 자연생태의 회복을 지켜보고 실험하는 ‘국립DMZ자생식물원’,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고 교육하는 생태공원들은 ‘냉전의 공간’이었던 접경지역을 ‘평화의 그릇’으로 만드는 중이다. ‘평화의 그릇’ 만들기에는 문화예술적 상상력도 필요하다. 1994년 철원 노동당사를 배경으로 한 KBS 열린음악회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는 대중음악을 통한 노동당사의 전회(轉回)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다. 2010년대 이후 거의 매년 열리고 있는 DMZ 뮤직 페스티벌도 이 연장선에 있다. 또한 남북을 연결하는 지하 터널로서의 땅굴 재활용 등과 같은 제안과 상상력도 새로운 ‘평화의 그릇’을 만들 때 필요한 요소들이다.

사실 『대한민국 평화기행』은 미완성이다. ‘평화’를 사색하고 실천하며 기록할 현장이 아직 많다. 서른 개의 꼭지에 맞추면서 포함하지 못한 평화 답사지가 많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기행이 아니기에 절반의 기행이다. 한반도 평화답사와 기행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남북한의 화해와 교류, 나아가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감과 지지,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실현된다는 의미이다. 그야말로 새로운 ‘평화의 그릇’이 만들어지고 우리의 삶과 의식도 한층 평화로워짐을 뜻한다. 언젠가는 제진역(강원도 고성군)에서 동해북부선을 타고 금강산과 원산을 답사하고,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유럽까지 여행할 수 있기를 꿈꿔본다. 그렇게 『한반도 평화기행』을 집필할 날을 희망해 본다.

강원도 고성 제진역에 세워진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 표지석

한 모 니 까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