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52022.03.

3·1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3·1운동 80주년을 맞은 1999년 3월 1일에 완공한 3·1독립운동기념탑

우리고장 평화의 길

호국과 평화의 뜻을 기리며 걷다
장충단 호국의 길

호국을 위했던 대한제국 장충단의 정신이 평화통일을 위하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사무처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다. 바로 장충단 호국의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며 과거 열사들의 호국의 뜻을 가슴에 받들고, 한반도 평화통일의 숙원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슴 먹먹한 역사가 잠든 장충단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올라오면 장충단공원 입구가 나온다. 장충파출소 옆으로 남산을 향해 몇 걸음 옮기다 보면 낡은 ‘장충단비’가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면서 장충단공원을 거쳐 남산으로 올라가지만 이 비석에 대해서는 크게 유념하지 않는다.

장충단비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년) 당시 일본군에 대항해 싸운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제단인 장충단의 석비로 1900년에 세워졌다. 이곳에 장충단이 세워진 것은 조선 후기 수도 방어를 위해 창설된 어영군의 분영이었던 남소영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 남산 성곽 옆 군부대 터에 대한제국 현충원 개념의 장충단을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비극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장충단과 장충단비가 철거됐고, 장충단 터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신사인 박문사와 장충단공원 등의 유희시설이 세워졌다. 해방 이후 이를 철거하고 장충단비를 되찾아 현재 장충단공원 자리에 복원했다. 이 글에서는 장충단 길을 따라가며 호국과 평화의 정신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충단의 흔적 장충단비.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에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장충단의 석비다.
잊혀져 가는 호국 정신
장충단공원 안을 걷다 보면 동국대학교 방면으로 3개의 기념물을 잇따라 볼 수 있다. 가운데 있는 동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밀사로 파견됐던 이준 열사의 동상이다. 다른 하나는 ‘순국열사이한응선생기념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이다.

이한응은 대한제국의 주영 서리공사로서 당시 초강대국 영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을 했다. 1905년 한일협약과 2차 영일동맹 등에 항의하여 30대의 젊은 나이에 자결 순직했다. 대한제국은 이한응 열사를 장충단에 모셨고, 1960년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한응열사추모회가 기념비를 세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사의 존재조차 잘 알지 못한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기념비이다. 종교계와 청년 학생들의 노력으로 3·1운동이 출발했지만, 아쉽게도 유림은 독립선언서의 대표 성원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유림들은 이를 성찰하며 3월 3일 고종 장례식을 계기로 파리 만국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를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3·1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로 인해 3·1운동은 더욱 거족적인 운동이 되었고 세계사의 역사적 사건이 됐다.

이준 열사의 동상. 이준 열사는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지만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무시 때문에 울분으로 순국했다.
호국과 평화의 정신을 이어가는 남산공원
본래 장충단은 서울 남산 성곽 안쪽으로 장충단공원과 신라호텔, 서울 반얀트리호텔, 국립극장을 포함하는 큰 규모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원형을 잃게 되었고, 현재 장충단의 공유지는 장충단공원과 국립극장, 남산공원 일부로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장충단이 지니는 호국과 평화의 기운은 남산공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충단공원은 동국대학교 정문 앞에서 끝나지만 남산공원으로 그 정신이 이어져 정문 옆 ‘외솔최현배선생기념비’로 나타난다. 최현배는 한글학자 주시경의 수제자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윤동주 시인의 스승이기도 한 최현배는 순우리말을 강조하면서 해방 이후 한글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어학회의 동료였던 이극로도 비록 월북했지만 북한에서 한글 문화어 대중화에 기여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영화 <말모이>의 배경이 되기도 했는데, 이들의 한글 지키기와 보급운동에 힘입어 2004년부터 남과 북이 협력해 온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사업이 가능하게 됐다.

대한제국의 주영 서리공사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외교 활동을 벌였던
이한응선생기념비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해 국제 여론을 환기시킨
역사적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장충리틀야구장을 지나 남산 2호터널 입구로 올라오면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국가 공식 현충시설로 설치된 동상 중에서 안중근 열사 동상(5점)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유관순 열사 동상(4점)이 많음에도 이곳에 유관순 열사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곳 유관순 열사 동상은 원래 1970년 남대문 태평로에 세워졌다가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인해 1971년 이전 설치됐다.

이를 잘 알리기 위해 국립극장 입구 도로변에 ‘3·1독립운동기념탑’을 세운 것이다. 이 탑은 당시 이수성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건립위원장이 되어 1998년 8월 14일 기공식을 갖고 3·1운동 80주년인 1999년 3월 1일에 완공했다. 이 탑을 통해 장충단공원 입구부터 남산까지 본래 장충단의 의미인 호국과 평화의 정신을 살리고자 했지만, 이 또한 대중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근 서울 중구청에서 ‘장충단 호국의 길’ 모바일 앱을 개발하며 홍보활동에 나서고 있지만 더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현충시설 내 설치된 동상 중 그 수가 두 번째로 많은 유관순 열사의 동상. 원래 남대문 태평로에 세워졌다가 지하철 공사로 1971년 남산공원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호국과 평화의 정신을 계승해야 할 민주평통
3·1독립운동기념탑 건너편에는 ‘평화통일비’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민주평통 사무처가 자리하고 있다. 평화통일비는 민주평통 사무처로 올라가는 길목인 ‘평화통일로’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2006년 민주평통 창설 20주년에 세워졌다. 비석에 새겨진 제호는 통일지사 고(故) 문익환 목사의 부인 고(故) 박용길 장로가 당시 87세의 노령에도 친필로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아 쓴 것이다.

오늘날 호국과 평화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분단 극복 그리고 통일일 것이다. 민주평통 사무처는 호국과 평화의 정신에서 비롯되는 통일에 관한 국내외 의견수렴과 국민적 합의 도출, 그리고 평화통일역량 결집을 도모하는 기관이다. 민주평통 사무처의 위치는 그야말로 장충단 터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충단을 잘 모르듯이 민주평통이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70년이 넘도록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호국과 평화의 장충단 길을 널리 알리고, 장충단의 정신을 계승하여 평화, 번영, 그리고 통일의 한반도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민주평통 사무처로 올라가는 길목인 ‘평화통일로’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평화통일비
이 창 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사무처 정책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