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22022.10.

예술로 평화

분단의 유산 ‘용치’를 찾아서

“역사에 남는 문화유산으로 탈바꿈하길”

강원도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교사생활을 하며 강원도의 사진가로 활동해온 필자는 분단 풍경을 사진에 담아왔다. 2012년 세상에 나온 『아바이마을 사람들』은 30여 년간 들여다본 속초 청호동 실향민촌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삶을 흑백 렌즈에 담았고, 『또 하나의 경계』(2017년)에는 강릉에서부터 고성까지 동해안에 펼쳐진 분단 풍경 30년을 담았다. 남북 분단을 더 가깝게 체감하며 살아온 필자의 사진 작업 중심에는 늘 분단과 통일이 있었다.

이번 『용치여지도』 작업 역시 분단 작업의 수평적 이동인 셈이다. 과거 작업이 필자가 사는 고장 속초의 생활 속 기록이었다면 이번 작업은 우연히 찾아온 작은 인연이 발단이라면 발단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용치’, 한자로는 ‘龍齒’, 영어로는 ‘Dragon's Teeth’. 이 ‘용의 이빨’ 작업의 본격적인 시작은 2020년 5월 5일 평소 알고 지내던 한 화백이 SNS에 올린 용치 사진과 글을 보면서부터다. 어린이날을 맞아 파주생태학교에서 열두 가족의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용치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도와준 얘기였다. 그렇게 알게 된 용치를 처음 찾은 것은 우기가 지난 후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던 그해 9월 초였다. 진흙투성이인 산 중턱에 오르자 삭막한 용치에 생명이라도 불어넣은 듯 천진난만한 그림들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일을 계기로 인터넷에 ‘대전차 장애물’과 ‘용치’를 검색해보니 지자체나 시민단체에서 철거를 요구하는 민원 내용의 기사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용치여지도』는 이와 같이 갈등이 있는 곳을 찾아가 묻고 확인하며 용치를 찾아다닌 3년간의 여정을 담은 결과물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강원도 고성의 해안 백사장에서 용치와 마주치거나, 험준한 인제의 계곡에서 용치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 여정은 고성, 인제, 양구, 철원, 연천, 고양, 파주, 포천 등을 거쳐 서해안 교동도까지 이어졌다. 용치를 찾아다니는 길 곳곳에서 마주친 대전차 장애물 역시 분단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탱크 트라우마가 낳은 유산
용치는 냉전의 초긴장 속에 전면전을 대비해 ‘대전차 방호벽’과 함께 도로나 하천 등 예상 침투로에 대대적으로 설치했다는 게 정설이다. 평양, 개성을 지나 서울로 이어지는 길목인 파주 지역에는 수백, 수천 개에 이르는 용치 무덤들이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전면전의 가능성이 줄어들자 용도 폐기라도 된 듯 구조물 사이에 농사를 짓는 경우도 많았다. 앙코르와트 사원에서나 봄직한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용치가 한 몸이 된 모습도 보이고 오래된 농막들도 눈에 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서대문구 한 상가는 1층 필로티 구조를 탱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유사시에는 아파트를 무너뜨려 대전차 방호벽으로 쓸 용도였다고 한다.

지난 6월 진행된 『용치여지도』 전시 장소였던 ‘평화문화진지’ 역시 1970년 도봉구 중랑천 주변에 세워진 대전차방호시설이다. 2, 3, 4층 아파트 주거공간은 노후화로 2004년 철거됐고 1층의 군사시설은 방치돼 오다가 대전차방호 시설의 흔적들을 그대로 보존한 채 2017년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다락원체육공원과 서울창포원이 연이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사진 관계자 외에도 남녀노소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여줬다.

『아바이마을』, 엄상빈, 1997,
속초

『아바이마을』, 엄상빈, 1986,
속초

『또 하나의 경계 1』, 엄상빈, 1997,
속초

『또 하나의 경계 2』, 엄상빈, 2001,
양양


관람객들은 전시장을 감상하며 “전시장과 사진이 딱 맞아떨어진다”, “이런 시설물의 이름이 ‘용치’란 것을 처음 알았다”, “지금까지 다리를 놓다가 만 교각으로 알았다”, “하천에 수해방지용으로 세운 시설물로 알았다”, “한반도 허리에 이렇게 많은 수의 용치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보지 않았느냐?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제는 탱크로 전쟁하는 시대가 아니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한 연세 지긋한 어르신은 “도라산 대전차방호벽을 과거 ROTC 공병 중위 때 자신이 세웠노라”고 경험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특히 전시 첫날 방명록에 “가고 싶다. 내 고향 개성!”이라는 글을 남기고 쓸쓸히 돌아서시던 80대 어르신의 뒷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방호시설들도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 세워졌겠지만 이제는 지리적 환경과 시대적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대전차 장애물’이든 ‘용치’든 이제는 지혜를 모아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유산으로 탈바꿈하도록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는 시대를 기록하는 한 사진가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공릉천을 가로지르는 용치들』,
엄상빈, 2021, 고양

『용치지대에서 고추 파종을 하는 주민』,
엄상빈, 2022, 파주

엄 상 빈 남북사진문화교류위원회
위원장,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