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장애인의 대부 천노엘 신부
“제 마지막 꿈은 북한의 장애인을 돕는 것입니다”
천노엘(O’Neill Patrick Noel) 신부
• 1932년 12월 19일 아일랜드 출생
• 아일랜드 성콜롬반신학대 졸업(사제서품, 1956)
• 전남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 졸업(석사, 1988)
• 한국 최초 ‘그룹홉’ 창설(1981)
•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 설립(1993)
• 現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 대표이사(1998~)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국어로 할까요, 영어로 할까요?”
머리카락이 희끗한 외국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제20기 자문위원이자 ‘장애인의 아버지’인패트릭 노엘(90) 신부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57년 우리 땅을 밟은 노엘 신부는 지난 50여 년간 한국의 장애인을 위해 헌신해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한국 국적을 취득, ‘진짜 한국인’이 됐다.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천진난만한 미소와 청년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를 화상으로 만나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바람에 대해 들었다.
2016년 2월 4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특별공로자 국적증서 수여식에서 김현웅 당시 법무부 장관이 천노엘 신부에게 태극기를 전달하고 있다. 천 신부는 한국에서 장애인 삶의 질 향상과 인권 옹호 및 인식 개선 활동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이 됐다. (뉴스1)
“사회를 용서해주시렵니까”
한국에선 천노엘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32년 아일랜드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가치있는 삶을 꿈꾸던 25세 청년은 6·25전쟁의 폐허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7년 한국 땅에 처음 발을 디뎠다. 전
라도 지역에 정착한 천 신부는 사목활동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무등갱생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했다. 이곳에는 독거노인, 알코올중독자, 부랑자, 결핵환자, 장애인 등 600여 명이 집단생활을 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 중 유독 지적장애인이 천 위원의 눈에 들어왔다. 알코올중독자나 다른 노인들은 그가 갈 때마다 소주나 담배 등을 요청하곤 했지만, 지적장애인들은 “아이고 신부님,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하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천 신부는 자신의 필요를 밝히고 권익을 요구할 힘조차 없는 이들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봉사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됐다. 19세의 지적장애인 여자 아이가 급성 폐렴으로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해보니 아이는 임종 직전 상태였다. 아이는 “신부님, 감사합니다.” 한 마디만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병원 측에서는 자신들이 연고가 없는 아이의 장례비용을 부담할 테니, 시신을 해부용으로 기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천 신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년 동안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아이의 마지막은 인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례식만큼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니 다른 사람보다 더 정성스럽게 치러주고 싶었습니다.”
천 신부는 그 아이를 교회 묘지에 묻으며 묘비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사회를 용서해주시렵니까.”
1998년 무등갱생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시절 천노엘 신부(왼쪽)
천노엘 신부(가운데)가 그룹홈 식구들과 함께한 모습.
장애인을 위한 최초의 가족형 주거시설 그룹홈’을 만들다
그날 이후 천 신부는 지적장애인을 위한 특수사목을 결심했다. 장애인 특수사목을 이어가던 그는 1981년 안식년 휴가를 맞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다른 나라의 장애인 정책을 체험하고 돌아왔다. 이 기간 그가 배운 것은 ‘장애인 복지는 지역사회에 가까울수록, 작을수록 더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광주 시내 옆에 2층짜리 주택을 얻어 봉사자, 장애인 등 3명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지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며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한국최초의 ‘그룹홈’은 이렇게 출발했다.
“당시엔 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어요. 처음 그룹홈을 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미쳤다고 했죠. 수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저는 장애인에 대해 정부와 사회, 가정이 갖는 태도와 사고방식을 바꾸고 싶었어요.”
그룹홈 시설이 생겼다는 소문이 나자 식구가 한 명 두 명 늘어났다. 주변의 시선도 점차 바뀌어갔다. 그 사이 광주에만 16개의 그룹홈이 만들어졌고, 천 신부가 이끄는 ‘무지개공동회’ 안에는 엠마우스 어린이집, 장애인 직업훈련소인 엠마우스 보호작업장 등 아홉 개의 시설이 생겼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평생 헌신한 천 신부의 남은소망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바람을 묻자 그는 “100세가 되는 10년 후 아일랜드에 있는 조카들과 한국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더 큰 꿈이 있느냐고 묻자 “언젠가 북한에 그룹홈을 만들어 북한 장애인을 돕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제가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북한에도 그룹홈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 제 마지막 꿈을 펼쳐보고 싶어요. 통일 문제가 참 복잡해보이지만, 결국 사람이 해결할 수 있어요. 남북이 대화와 신뢰를 바탕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가야 해요. 문화예술 분야 교류부터 차근차근 진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 무지개공동회 안에 축구팀이 있는데, 언젠가 북한의 장애인 축구팀과 함께 공을 찰 수 있는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