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평화
남한 연극무대에 오른 북한 소설 ‘벗’
평화와 상생 위해 던지는 작은 질문
지난해 말 남한 연극무대에 북한 소설을 극화한 작품이 올라 화제가 됐다. 극단고래가 12월 1~11일 세계 최초로 무대에 올린 ‘벗’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의 백남룡 작가가 1988년 쓴 이 소설은 한 판사가 젊은 여성이 이혼소송을 청구한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의 가족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아보는 과정을 보여준다.
‘벗’은 1960년대 이후 북한 문학에서 매우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흔적이 없고, 평범한 사람의 연애·결혼·이혼·육아·직업 등 일상을 다룬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그늘 밑에 가려져 있던 북한 사람들의 미시적 삶의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로 평가받는다.
북한 사람들의 연애, 결혼, 이혼, 육아 다룬 작품
‘벗’은 2011년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된 이래 남북한 문학을 통틀어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기록됐고, 2020년 미국에서 번역 출판돼 미국 매체 ‘라이브러리 저널’이 뽑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필자는 2019년 이 작품을 각색해 남북연극교류위원회에서 낭독공연을 진행한 일이 있다. 남북연극교류위원회는 연극을 통해 남북한의 거리감을 좁히고 정치적 경색을 풀어보고자 2017년 발족된 단체로, 필자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낭독공연 당시엔 1988년 완성된 소설이 갖는 낡은 감각과 스토리를 지금의 남쪽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관객의 반응은 예상 외로 뜨거웠다. 제일 흔한 반응은 “북한 사람들도 우리처럼 사랑하고 이혼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구나.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적이고 따뜻한 정서가 북한에 남아 있구나.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구나.” 같은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반면 “북한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조작된 내용 아닌가? 세상에 저런 판사가 어디 있어? 북한 여성의 지위가 이렇게 높다고?” 같은 의심을 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필자는 북한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벗’을 꼭 정식 공연으로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벗’을 정식 공연으로 준비하면서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고, 정보 부족 때문에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재현하기도 어려웠다. 소설에 나오는 말이 어떤 뉘앙스를 갖는지, 등장 인물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리얼리티(사실성)를 만들어내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는 먼저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거쳐 남북저작권센터에 중개를 요청했다. 저작권센터는 남북관계가 경색돼 현재는 중개가 불가능하지만 남북 저작권 교류가 재개되면 중개요청을 북측에 전달하겠다는 답변을 줬다. 일종의 중개 공탁을 걸어놓은 셈이다. 하루빨리 남북관계가 개선돼 문화예술 교류가 활발해지길 빌어본다.
북한이탈주민 조언 통해 원작 구현
북한의 일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도 열심히 찾았다. 북한 관련 영상물이나 작품을 통해서는 진위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최선의 길은 북한에 가거나 아니면 북한 사람을 만나 실상을 전해 듣는 일일 것이다. 필자는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북한 잠수정 얘기를 다룬 연극 ‘고래’를 만들 때 감수를 해준 홍강철 씨와 남쪽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김봄희 씨를 만나 얘기를 나눴고, 두 사람이 함께 작품에 참여하기로 했다. 특히 김 씨는 배우로 무대에 서면서 작품 분석과 이해에 큰 도움을 줬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에게 북한의 일상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으면서 소설 속 장면을 이해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남쪽 배우들이 갖고 있던 북에 대한 불신과 의문이 많은 부분 해소됐다. 북한 사투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남북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식 차이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또한 김 씨의 정체성이 작품 마지막 장면에 반영되기도 했다.
필자는 연출을 하면서 최대한 원작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북한어를 살리기 위해 원작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대본을 구성했다. 그러다 보니 소설적 산문 형식의 단점이 도드라졌다. 템포에 변화를 주고 장면전환을 보완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영상과 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반도네온 라이브 연주를 도입한 것이 작품을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자평한다. 그렇게 남과 북이 스미고 섞여 하나의 공연이 성공적으로 올라갔다.
관객 반응은 예상보다 더 뜨거웠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울산에 사는 어느 가족이 울산에서도 공연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앙코르 공연에 대한 요구가 많아 현재 재공연을 고려 중이다.
남북관계가 위태롭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연극 ‘벗’은 작품의 내용 측면에서나 시사적 측면에서나 의미가 깊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모든 가치는 사라질 것이다. 평화와 상생을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의 좌표를 되돌아봐야 할 때다.
각자의 주장만 하고, 이분법적으로 대립하고 단절하는 세태에서 해결책은 무엇일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상대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곡되고 과장된 정보로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지는 말아야 한다. 연극 ‘벗’은 평화와 상생을 위한 작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해 성
작가·연출가, 극단고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