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62023.02.

슬기로운 남한 생활

한예종 졸업 앞둔
탈북 기타리스트 유/은/지

“영혼을 울리는 연주자 되고 싶어요”

“음악은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음악이 없으면 삶에 재미가 없고, 의미도 없을 것 같아요. 유은지의 음악은 정말 특별하고, 뭔가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유은지(36) 씨는 왼손을 얼굴 높이로 들어보였다. 작고 가냘픈 손이지만, 황금보다 귀한 손이다. 이 손이 그를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끌었다. 북한이탈주민 특례입학 제도가 없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2019년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클래식 기타 전공자로 입학하게 한 손이기도 하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유 씨는 2006년, 음악을 배우고 싶어 탈북했다. 이후 온갖 고생끝에 남한에 와서 한예종 학생이 됐다. 남쪽에 정착한 탈북민 3만 5,000여 명 가운데 한예종 입학생은 유 씨가 처음이다. 북한 출신으로, 그것도 연하 띠동갑들과 경쟁하면서 그는 남한 사회의 치열한 입시 경쟁을 톡톡히 경험했다. 그럼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건, 자신이 한국에 온 이유를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이 시작되면서 유 씨 손에 약간 이상이 생겼다. 입시 준비 때 나타났던 신경 이상 증세가 재발한 것이다. 그 탓에 2023년 2월로 예정됐던 졸업을 위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한예종을 졸업하려면 1시간짜리 단독 연주회를 학교 콘서트홀에서 열어야 한다.

“졸업연주회 준비를 하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외부 연주도 다니다 보니 손가락에 무리가 많이 갔나봅니다. 그래도 6월쯤에는 졸업연주회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히 새해 들어 손가락 상태가 좀 좋아졌다. 졸업 연주회 프로그램도 거의 완성했다.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 등 각 시대별 대표곡으로 고루 구성할 계획이다. 1월 10일 유 씨는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으면서 알베니즈의 ‘아스투리아스(전설)’를 연주했다. 연주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는 전날 한국기타협회 유튜브 채널에 올리기 위해 이 곡을 녹음했다고 했다.
탈북민 최초 한예종 입학 성공기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유 씨의 삶은 어땠을까. 정부가 그에게 제공한 첫 임대아파트는 대구에 있었다. 그는 남한 사회에 적응하면서 계명문화대 실용음악과를 다녔다. 북한에서 배웠던 기타 실력을 그곳에서 다시 갈고 닦았다. 2년간 학업을 이어가는 사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갈증이 더 커졌다. 서울로 거처를 옮기며 본격적으로 한예종 입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돈이 부족해 반지하 월세방을 얻어 살면서 물류센터에서 박스 포장 일을 했다. 냉동창고에서 식품을 나르고 호텔 서빙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기타 연습만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예종에 들어가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 또한 따라야 해요. 저는 삼수 끝에 합격했어요. 실기 시험은 당일 연주자의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너무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컨디션 관리가 제일 중요해요. 삼수 때는 정말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 ‘올해 무조건 붙는다’라는 마음으로 실기 시험에 임했던 것 같아요.”

한예종 합격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북한에 살 때도 평양의 음악대학에 진학해 음악 공부를 하는것을 꿈꿨지만, 집안 형편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에게도 꿈의 학교인 한예종에서 제가 수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좋았어요. 매일매일 힘들어도 그저 좋았어요.”

사실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교수나 학생들이 외래어를 많이 써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조차 힘든 시간도 있었다. 6개월쯤 지나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 서너 시간 자기도 힘든 날들을 지금껏 버텨왔다.

북한이탈주민 가운데 최초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기타리스트 유은지 씨.
“기타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동시에 생활비와 레슨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계속 했고요. 연주자는 몸 관리도 잘 해야 합니다. 전공 곡이나 시험 곡 중에는 긴 곡이 많거든요. 고정된 자세로 한참동안 연주하다 보면 허리와 팔이 아프고, 골반도 틀어져요. 지금 저는 온몸이 다 병이에요, 병. 조금이라도 덜 힘들려면 평소에 지구력을 길러야 하고, 스트레칭도 꾸준히 해야 하죠. 그래도 학교 다니며 열심히 연습한 만큼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해요.”

유 씨가 처음 기타를 배운 건 1994년 함흥 인민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우연히 북한군 협주단의 클래식 기타 연주를 듣고 반해서 딸을 기타리스트로 키우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철학과 한문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기타를 배웠다. 어린이용 클래식 기타가 없어 어른 손에 맞는 커다란 통기타를 치는 바람에, 한동안 손가락이 아파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열두 살이 됐을 때 비로소 처음 클래식 기타를 접했다. 아버지 친구가 소개한 어느 여성을 만나면서였다. 일본 대학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한 그 여성은 함흥 중심부에서 살고 있었다. 외곽에 살던 유 씨는 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2시간에 걸쳐 그 선생 집에 찾아가 기타를 배웠다. 그렇게 6년을 배우는동안 유 씨의 기타 실력이 크게 늘었다.

자연스레 음대 진학을 꿈꿨던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온 것은 고등중학교 졸업 직전. 아버지가 대학에서 학생들과 한국 드라마를 봤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보위부에 잡혀간 것이다. 아버지는 벌금형을 받았고 전문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막대한 벌금을 내느라 생긴 빚 때문에 어머니는 시장에서 음료수 장사를 시작했다.

“집안이 기울어 음대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내내 음악공부를 했으니 이걸 써먹을 수 있는 직업을 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아버지 친구 분이 유치원 음악교사 양성소가 생겼다는 걸 알려줬어요. 거기서 2년간 열심히 공부했고, 졸업시험에서 종합 1등을 해 좋은 유치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6개월 정도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어느 날, 그는 또 한 번 삶의 전환점을 만난다. 학부모 가운데 무역업을 하는 사람에게서 ‘탈북’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것이다. 그 무역상은 유 씨가 남한에 가족이 있는, ‘토대’(출신성분)가 좋지 않은 집안 출신임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 분이 ‘남한에 작은 할아버지가 있다고 하던데, 중국으로 나가서 한번 찾아보겠느냐’고 물어보더군요. 남한 친척을 찾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도 했어요. 그전에도 종종 남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남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요. 제가 특히 좋아했던 건 클래식 전문 음악방송이었어요. 라디오 주파수가 잡혔다 안 잡혔다 하긴 했 지만, 그런 음악을 들으면 무척 황홀했어요. 그래서 음악 공부도 할 겸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학부모 무역상의 도움으로 가짜 통행증을 만들고, 국경 경비대원도 소개받았다.

문제는 그곳에서의 생활이었다. 당초 계획과 달리 남한의 친척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고, 유 씨는 중국에서 4년을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식당에서 일했으나 북한 사람이라는 게 알려져 더 일할 수 없게 됐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안전 문제 때문에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 주겠다는 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함께 살기도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 신분으로 살아가는 상황에서 음악을 제대로 공부하기란 불가능했다. 중국말도 서툴렀다. 남한의 위성방송을 보면서 하루하루 한국 사회에 대한 동경이 더욱 커졌다. 결국 유 씨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유은지 씨는 한예종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꿈꾸며
매일 기타 연습과 영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미국 유학 꿈꾸며 영어 공부 몰두
2010년 10월 중국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 도착한 유씨는 당국의 조사를 받고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를 거쳐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북한 사람은 뭔가 다를 것이다’라는 남한 사람들의 편견도 느꼈다. 자신을 동정하는 눈초리도 싫었다. 남한 생활이 5년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그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었으면 했고, 의지할 곳도 필요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입시를 거쳐, 한예종 학생이 됐다.

유 씨는 3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학생이다. 공부가 최우선이다 보니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형편이다. 탈북의 동기가 됐던 남한의 친척도 한번 만나고는 다시 뵙지 못했다. 딸의 안부가 궁금할 부모님에게 연락할 방도 또한 찾지 못했다.

“부모님이 많이 보고 싶어요. 그래도 유학 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야죠. 연락이 될 때까지요.”

한예종을 졸업하면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다. 요즘은 어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스승도 찾고 있다. 세계적 명문 줄리어드 음악원은 그가 입학하고 싶은 학교 중 하나다.

“음악은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음악이 없으면 삶에 재미가 없고, 의미도 없을 것 같아요. 테크닉이 아무리 좋아도 영혼이 없는 연주는 감동을 주지 못해요. 저는 연주가 끝나면 징 하고 마음이 울리는 그런 연주를 하고 싶네요. 유은지의 음악은 정말 특별하고, 뭔가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