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2024년 북한 정세 전망
北 ‘고슴도치’ 아닌 ‘독사’ 전략 예고
긴 안목에서 일관성 있는 통일·대북정책 필요
북한은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남북관계를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가’로 간주하면서 매우 공세적인 대남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4월 우리나라 총선과 12월 미 대선이 치러지는 올 한 해 북한 내부 정세와 대남 전략을 전망해봤다.
북한의 대남 전략은 평화적 방법과 비평화적 방법을 배합하는 전술에서 비평화적, 특히 전쟁 위협을 지원하는 공세적 전술 구사가 예고됐다. 올해 초를 전후로 한 북한 동향을 보면 대남정책 전환과 함께 두 가지 ‘이례적인’ 내부 조치가 병행됐다. 하나는 대남 사업 전환이라고 하면서도 남한에 대한 조치가 아닌 북한 내부에 대한 조치를 우선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은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대남정책 및 기구는 물론 헌법 규정, 우상화물 관리, 주민 교양에서 민족, 화해, 평화통일 개념과 관련된 것들을 다 지워버리고 대한민국을 적대 국가로 간주하는 대적(對敵) 교양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하나는 대남정책 전환과 무관한 지방 경공업 발전 문제가 연초부터 북한의 정책 이슈에서 비중을 두고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은 1월 중순 최고인민회의에 이어 1월 하순 묘향산에서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지방 공업 발전 문제를 논의했다. 회의에서 김정은은 “지방 인민들에게 초보적 생필품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은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면서 “매해 각 도마다 2개 군(郡)씩 지방 공업공장을 증설할 것”을 지시했다. 2월 초에는 김정은이 직접 김화군 본보기 공장을 시찰했다.
내외 곤경 국면 ‘정면 돌파’ 성격 짙어
북한이 각종 미사일 발사로 ‘남조선 평정’을 위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민들에게 대적 교양을 강화하고 민생 불만 해소를 도모함에 따라 김정은의 적대국가론과 대남정책전환론이 ‘대사변’을 준비하는 공세적 성격인지, 남북 국력 격차 심화에 따라 흡수통일을 우려한 수세적 조치인지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필자의 판단은 북한의 정책 기저에 수세적인 기류가 없지 않으나, 당면한 내외 곤경(困境) 국면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공세적 성격이 짙다고 본다.
최근 일련의 북한 동향이 공세적인 상황 타개 전략임은 무엇보다도 김정은의 내외 정세 인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남북 간 체제 경쟁의 운동장이 기울어진 지는 오래지만 중요한 것은 북한 독재자의 당면한 정세 인식이다. 김정은은 2023년 하반기 이후 국경무역 재개, 곡물 증산, 대러 무기 수출로 경제가 다소나마 개선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절대적으로는 제재 이후 북한 경제 규모가 워낙 크게 위축돼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나, 최근의 호전으로 주민들에게 한동안 더 인고(忍苦)를 강요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습이다. 특히 대러 밀착을 통한 무기 수출과 인력 송출로 고갈된 통치자금이 채워지자 김정은은 여유를 부려 연초부터 농기계공장 시찰, 지방 발전계획 제시 등 민생 행보를 늘리고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월 20일 김덕훈 내각총리
가 평안남도와 남포시의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료해(파악)했다고 보도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의 자신감은 내부 사정보다 유리한 주변 정세 전개에 더 근거한다. 동시다발 전쟁으로 촉발된 ‘신냉전’의 국제 정세, 한국과 미국의 선거 등 주변 정세의 유동성, 대러 밀착에 이어 북·중·러 연대 강화 등으로 김정은은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전략 국가가 된 듯 착각하고 있다. 그는 건군절(2월 8일) 연설에서 남북관계를 대적 관계로 전환함으로써 “주변 환경을 더욱 철저히 국익에 맞춰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했다. 특히 핵미사일 고도화에 진전이 있고, 무기고에 첨단 장비가 쌓여가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강도 높은 도발로 현상을 변경할 수 있다고 오판할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북한의 정책 전환이 수세적 성격이라는 주장은 대적 교양 강화를 통한 남한풍 확산 차단, 내부 불만 해소를 위한 의식주 개선 추진 외에 김정은의 핵 사용과 전쟁 위협이 ‘우리와 군사적 대결을 기도한다면’ 등 조건부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에 탄약과 무기를 대규모로 수출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김정은의 말은 정세 판단의 중요한 단서이나 그의 말 전체가 사실은 아니며, 그의 입과 손을 동시에 봐야 한다. 북한은 연초부터 고체연료 기반 극초음속 IRBM 시험발사(1.14), 잠수함 발사 전략순항 미사일(SLCM) 불화살-3-31형 시험발사(1.28) 등 한미를 위협하는 핵미사일 도발을 강화하고 있다.
북한은 고슴도치가 아닌 ‘독사 전략’을 예고하고 있다. 김정은이 남북관계를 대적 관계로 규정하면서 노골적으로 전쟁 위협을 고조시킨다는 점에서 도발 수위를 크게 높일 것임은 불문가지다. 과거와 같은 단발성 도발로는 한반도 현상 변경이 가능하지 않음을 북한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향후 예상되는 북한의 도발은 한국과 미국 사회에 ‘전쟁이냐 평화냐’ 위기 조성과 북한에 유리한 대북정책 전환 여론 조성을 목적으로 고강도·복합 도발, 책임 전가 또는 회색지대형 도발을 점차 높여나갈 것이다.
‘전쟁’ 위험 느낄 정도 고강도 도발 우려
첫째, 한국 사회에서 ‘전쟁하자는 것이냐’라고 느낄 정도로 고강도 도발을 할 것이다. 도발의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미국 여론에도 영향을 미쳐야 하고 중·러와의 연대 효과도 발휘해야 하므로 핵미사일 도발이 포함되고 국제적 쟁점화할 수 있는 성격의 복합 도발을 할 것이다. 셋째, 도발의 귀책사유를 남한에 전가하거나 출처 불명의 책임 전가형 혹은 회색지대 도발 소재를 찾을 것이다. 넷째, 북한의 대남정책 전환과 도발 위협이 2026년 1월 예정된 9차 당 대회를 앞두고 성과 거양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단발성 도발보다는 도발 효과를 보아가면서 점차 확대하는 점증형 도발이 예상된다.
구체적으로는 NLL(북방경계선)·MDL(군사분계선) 충돌이나 천안함 폭침 유사 도발을 시작으로 2013년 3월의 전방위적 전쟁 위협, 2015년 8월의 준전시상태 선포, 2017년의 핵미사일 도발이 함께 어우러지는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도발은 NLL·MDL 총·포격 도발에서 시작돼 대남 ‘준전시상태’ 선포와 대미 ‘괌 포위사격’ 위협을 병행하는 수위로 높였다가, 한미가 대응하면 추가 핵실험과 ICBM 혹은 SLBM 발사 형태로 비화될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상황에 따라 이들 도발 순서를 조절할 것이며, 남한 사회 교란을 위한 사이버 공격도 강화할 것이다. 도발 시점은 올 3월이나 8월 한미 연합훈련(자유의 방패, UFS)을 기회로 삼을 수 있고, 올 4월 한국 총선과 11월 미국 대선이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북한의 핵 도발을 가상한 올 8월 한미의 UFS 훈련 직후, 미국에서는 대선 후보 토론회가 진행되는 시점인 8월 말~9월을 도발의 적기로 간주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20일 오전 경기 여주시 남한강에서 열린 한미연합 도하훈련에서 완성된 부교를 활용해 기갑전력이 도하하고 있다. (육군 제공)
그렇다고 북한의 도발이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남반부 평정’이 실현 불가능한 희망에 불과하고 대적 교양, 경제 재건 등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핵미사일 고도화에 편향된 정책을 추구해와 오랜 민생 방치에 따른 주민 불만이 남한에 대한 동경심 확산과 어우러져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김정은으로서는 ‘경제발전 5개년(2021~25) 계획’ 완료 2년을 남겨놓고, 2025년 10월 당 창건 80돌과 2026년 1월 9차 당 대회라는 경축 행사를 앞두고 뭔가 성과를 내놓아야 하는 입장에 있다.
김정은은 핵 우선 투자로 전면적인 의식주 개선이 불가능해지자 몇 가지 생색내기 사업을 내걸었다. 평양 5만 가구(매년 1만 가구씩 5년) 살림집 건설, 국영상업망 활성화, 간부 및 공장·기업소 종사자 대상 곡물 배급제, 아동 대상 유제품 및 학용품 공급 등 특권층을 대상으로 한 차별적 시혜 조치를 추진했다. 주로 평양 위주의 민생 개선으로 지방 주민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2022년부터 북한판 농촌 새마을운동을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간장·된장 경공업 공장 증설을 내걸었다. 둘 다 10년짜리 계획이다. 지난해 말부터 ‘제2의 천리마 운동’이 거론되듯이 북한 당국은 5개년 계획 막바지에 접어든 만큼 증산 독려를 위한 동원 체제를 강화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대적 교양, ‘전민 항전’ 준비, 증산 투쟁으로 더욱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끊임없이 통일 지향하는 노력 견지해야
전례대로 한다면, 오는 3월 제1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임기 5년) 선거가 있고 한 달 뒤 최고인민회의 회의를 소집해 ‘국가지도기구 재구성’도 예정됐다. 그런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공고가 없는 점으로 보아 뒤로 미뤄지는 모양이다. 김정은의 지시 사항인 헌법 개정을 먼저 추진한 뒤 최고인민회의를 재구성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두른다면 김정은이 지난 1월 지시한 ‘영토 규정, 남한 수복·편입 명기, 남과 북을 민족으로 오도하는 개념 폐기, 대남 주적 교양 강화, 북반부와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 삭제’ 등 5개 항의 대남 사업 관련 헌법 개정이 오는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김정은의 대남 사업 전환이 선대 수십 년에 걸친 ‘고려연방제 통일’ 담론을 흔들어놓는 일이라서 내부적으로 혼란과 갈등은 불가피해 보인다.
우리로서는 남북관계를 긴 안목에서 보고 통일을 포괄하는 안보 관리가 필요하다. 어떤 정책이든 성과를 거두려면 일관성이 중요하다. 북한 지도부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안보를 확고히 하고, 대화와 협력으로 평화를 관리하며, 끊임없이 통일을 지향하는 노력은 견지돼야 한다. 통일·대북정책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의 확대 재생산은 북한의 의도에 휘말리는 것이다.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에 ‘자유’ 개념을 추가해 보완하는 등 현실적인 통일정책 정립도 필요하며, 그동안 북한 자극을 우려해 비공개적으로 추진해온 급변 대비 계획도 이제는 공론화해 연구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 기 범
전 국정원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