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길에서 만나는 통일
① 동해 해파랑길-부산
임시수도 피란민 흔적 오롯이 남아
바닷바람에 실려 온 ‘애국 혼(魂)’
2021년 12월 우리나라 최장거리 걷기 여행길 ‘코리아 둘레길’이 탄생했다. 코리아 둘레길은 한반도 가장자리의 길을 연결하는 총 4544㎞의 걷기 여행길이다. 동해 해파랑길, 남해 남파랑길, 서해 서파랑길, 비무장지대(DMZ) 접경지역 등 250여 개에 달하는 코스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파랑길은 해안의 아름다운 경관과 해안길, 숲길, 마을길, 도심길 등 다양한 유형의 길이 어우러져 걷기 여행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이 방대한 코스 가운데 ‘평화통일’의 시선으로 6코스를 선별했다. 햇살과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반도 곳곳에 배어 있는 분단의 상처를 더듬고 평화통일을 기원해보는 것은 어떨까.
대한민국 동해의 절경을 감상하는 명소를 꼽자면 해파랑길을 빼놓을 수 없다. 해파랑길은 동해의 상징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 ‘파랑’, ‘~와 함께’를 뜻하는 접속조사 ‘랑’을 합쳐 만든 말이다.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최근 걷기 바람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해안길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부산시 남구 용호동 오륙도 달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를 잇는 약 750km 길로, 남북이 분단된 현실 속에서 해파랑길 순례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간이 돼준다.
동해와 남해 경계선 오륙도
“오륙도 해맞이공원에 가시게예? 여가 동해와 남해를 가르는 경계입니더.”
박종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부산 남구협의회 회장이 인사말을 건넨다. 그의 말대로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으로 올라가면 해파랑길, 전라남도 해남으로 내려가면 남파랑길로 길이 갈린다.
해파랑길 들머리 격인 오륙도는 부산 남구 용호동 승두말부터 부산만을 향해 나란히 위치한 섬.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로 보여 오륙도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신생대 이후 해수면의 상승으로 이뤄진 해식 이암으로, 국가 지정 명승 제24호로 지정됐다.
걷기로 한 2월 중순 부산에는 꽤 매서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춥다 해도 부산은 따뜻한 남쪽 나라다. 바닷바람에 코끝이 시리고 귀와 볼이 따가웠지만 오후 햇살에 힘입어 나무로 잘 짜인 계단을 올랐다. 10분쯤 걸었을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낭떠러지였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파도가 골을 파고들며 부서졌다. 오륙도 해맞이공원은 자연 보존 상태가 좋다. 산자락에는 희귀한 식물과 나무가 많이 산다. 가파른 언덕 위로 피어난 노란 수선화가 군집을 이룬다.
내호냉면은 부산 밀면을 처음 탄생시킨 식당으로, 유상모 씨가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수려한 경관을 보며 불현듯 떠올리는 것은 6·25전쟁의 참화다. 오륙도 앞 해상은 적군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떠난 우리 해군의 첫 전투함 ‘백두산함’의 출발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백두산함은 동해, 서해, 남해의 여러 기지를 돌고 복귀했다. 느닷없이 통제부사령장관의 작전 명령 지시가 떨어진 것은 당직 항해사가 군함 청소를 마친 이후였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면서 후방지역을 교란하기 위해 소련제 군함을 앞세워 당일 새벽 부산 침투를 시도한 정황을 국군이 포착한 것이다. 이날 오후 3시 백두산함은 부산에서 오륙도를 바라보며 소해정 YMS-512정을 데리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청사포 앞바다에서 선제 포격을 가해 북한군 600명을 수장시켰다. 당시 투입된 백두산함의 승조원 60여 명이 결사항전으로 북한군을 막아낸 덕에 부산해협 해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셈이다.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빠져나오니 저 멀리 부산항 광경이 보인다. 꼿꼿이 몸을 세우고 선 여객선 위로 육중한 화물이 차곡차곡 얹혀 있다. 위태위태해 보이는데, 용케 거친 바닷바람을 견뎌낸다. 마치 천년만년 바다를 바라보고 선 오륙도의 자태를 보는 듯하다.
3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부산시 남구 우암동. 바다를 바라보는 소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두와 맞닿아 있는 우암동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동네다. 우암동 골목 안쪽에는 부산 대표 음식인 밀면이 처음 탄생한 ‘내호냉면’이 둥지를 틀고 있다. 33㎡(10평) 남짓한 자그마한 공간에서 만든 밀면은 술술 넘기기 좋고 칼칼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으로, 성격 급한 부산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했다.
내호냉면에서 파는 물밀면과 만두, 양념가오리회.
밀면을 개발한 사람은 전쟁 때 부산으로 내려온 이북 피란민이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유상모(76) 씨는 1950년 흥남 철수 때(12월 15~26일) 아버지 유복연 씨와 어머니 정한금 씨를 따라 함경남도 함흥 내호리에서 우암동으로 피난 와 정착했다. 1953년 어머니 정 씨는 이곳에 냉면집을 개업했다. ‘내호(內湖)’라는 가게 이름은 고향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 정 씨의 어머니(유 씨의 외할머니)인 이영순 씨가 1919년 10월 함흥에 문을 연 ‘동춘면옥’에서 일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피란민들이 비싼 냉면을 사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자 정 씨는 1959년 밀면을 개발해 개시했다. 유 씨의 설명이다.
“전쟁 당시 원조물자로 밀가루가 보급됐으예. 수제비나 국수를 만들어 먹으라고 줬다 아입니꺼. 밀가루로 냉면처럼 만든 것이 밀가루 냉면, 즉 밀면의 시작이었으예. 그때만 해도 밀면의 맛을 아는 곳은 우암동뿐이었으예.”
가족과 생이별해 타지에서 눈물을 훔쳐야 했던 이북 피란민들에게 밀면은 고단한 피난살이를 견디게 해주는 고향과 같은 음식이었던 셈이다.
내호냉면 가게 벽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또 있다. 유 씨 부친이 북녘 고향에 돌아가거든 집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본적 지도와 주소(함경남도 흥남시 수서리 72, 73번지)를 적은 것이다. 길과 지명이 자세하게 표기돼 있고, 그 아래에는 수십 년째 붙이지 못한 편지가 내걸려 있다.
박종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산 남구협의회 회장.
소 막사에서 살았던 피란민들
‘우리 민족이 58년이라는 세월을 안부도 전하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도 못 하고, 88세의 나이에 마감합니다.’
유 씨는 “모친이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니 가게를 확장하지 말고, 솥도 옮기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유 씨의 외아들로 2017년부터 4대째 가업을 승계하고 있는 재우 씨는 “비록 조부모가 이승에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나 하늘에서는 이북 고향을 찾아가셨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보낼 소를 가두기 위해 지은 소막은 6·25전쟁 때
피란민의 거주지 로 쓰였다. 사진은 당시 소막 내부를 재현한 모습.
부산 우암동 소 막사에 전시된 6·25전쟁 당시 유물.
우암동에는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양쪽 집들이 하나로 이어지듯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집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보낼 소를 가뒀던 소막(幕)이다. 소막 안에 칸을 지어 살던 주거 형태가 세월이 흘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김용식 우암동 소막사 해설사는 “한 칸 길이가 6자로 180cm인데 한 가구당 2칸, 3칸 정도를 불허받아서 연결해 집이 형성됐다”며 “이 유산은 20세기 냉전기 최초 전쟁 당시 피란민이 품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물”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소의 울음으로 뒤덮였던 우암동은 삶의 애환과 전쟁의 상처를 고이 간직한 피란민의 동네로 남아 전쟁과 평화의 가치를 들려주고 있다.
6·25전쟁 시기에 몰려든 피란민들이 소 막사를 주거공간으로 사용하면서 형성된 우암동 소막마을.
글·김 건 희 기자 사 진· 홍 중 식 기자
함께 둘러보면 좋은 부산 여행지
1023 피란 수도 세계유산 탐방길
동아대 석당박물관을 나서면 2023년 2월 부산 서구청에서 새로 조성해놓은 ‘1023 피란 수도 세계유산 탐방길(임시 수도 탐방길)’이 펼쳐진다. 6·25전쟁 당시 1023일간 피란 수도 부산의 중심지로 자리했던 서구를 조명하는 취지로 조성된 역사·문화 탐방길이다. 부산 서구는 전쟁 당시 행정, 교육, 문화 등 다양한 거점 시설이 위치해 피란 수도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임시 수도 당시 대통령 관저로 쓰인 임시 수도기념관(경무대)으로 가는 사거리 길목에는 전차가 볼거리다. 골목길 안쪽에는 참전국 기념비, 벽화 등이 피란민의 삶과 당시 임시정부 모습을 보여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옛 부산 임시수도 때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사용한 빨간 벽돌 건물이 나온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1925년 경남도청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굴곡진 현대사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우선 건물 자체가 6·25전쟁 때 옛 부산 임시 수도 정부청사(임시중앙청)로 활용돼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박물관 내부에는 문화재로서 건물을 조명할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건물 한쪽에는 복원 공사를 하며 나온 주요 건축 잔해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해뒀다. ‘한국전쟁기 피란 수도 부산의 유산’ 중 하나로 등재돼 2022년 12월 문화재청 세계유산분과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1959년 11월 부산 최초의 박물관으로 개관했으며, 현재는 동아대 부민캠퍼스에 자리하고 있다.
유엔평화기념관
전쟁의 실상을 체험하지 못한 후대에게 전쟁의 참상과 정전협정의 무게를 각인시켜주는 교육적 공간이다. 참전자들의 희생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건립됐다. 기념관 내 3개의 상설전시관(UN한국전쟁기념관, UN참전기념관, UN국제평화관)을 둘러보면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고 평화 유지를 위한 희생과 의지를 되새기게 된다. 올해는 개관 10주년을 맞아 볼거리가 더욱 풍성하다. 노후화된 전시 공간에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조성한 공감형 디지털전시관이 특히 돋보인다. 확장 현실(XR) 영상 제작 기술을 활용해 장진호 전투의 혹독한 추위를 실감형 콘텐츠로 구현한 1층 한국 전쟁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