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정착 이야기Ⅰ
티모시 조 APPG NK 사무국장
‘꽃제비’에서 英 하원의원 비서로 변신
영국 의회에서 제2의 인생 시작
부모의 탈북으로 일정한 주거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꽃제비 신세로 한순간 전락한 아홉 살 소년이 있다. 열일곱 살이던 2004년 중국으로 탈북했으나 강제북송을 당하고 만다. 그때 그는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탈북을 시도한 끝에 필리핀으로 추방됐다가 한국을 거쳐 영국으로 향한다. 이 탈주극의 주인공은 현재 영국의 젊은 정치인으로 거듭나 영국 의회 내 ‘북한 문제에 관한 초당파 의원 모임(APPG NK, All-Party Parliamentary Group on North Korea)’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꽃제비 출신 영국 정치계 신예
‘영국 정치계 떠오르는 신예’로 불리는 탈북자 티모시 조(37·한국명 조국성)의 2004년 이후 삶은 10대 청소년 시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하다. 한 편의 서사소설 같은 그의 인생은 한 차례의 대단원을 거쳐 잠시 숨을 고른 후 지금 제2막을 올리는 중이다. 2막의 주제는 단연 ‘정치인 티모시 조’일 것이다.
신년을 맞아 스위스와 이탈리아, 영국을 거쳐 우리나라를 찾은 조 사무국장을 서울 중구 장충동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에서 1월 26일 오후 만났다. 이날 오전 그는 김관용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만나 북한 인권 현안과 한반도 통일 등 국제 정세에 대해 협의했다. 조 사무국장은 지난해 11월 8일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열린 행사에 초청돼 영국 런던 외곽 뉴몰든의 한인타운을 방문한 찰스 3세 국왕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영국 지역사회 젊은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탈북 동포를 대표해 찰스 3세와 마주한 것이다. 그의 설명이다.
“찰스 3세는 일일이 사람들의 손을 잡고 미소를 내보이며 다정한 모습을 보여줬어요. 그러다가도 탈북민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15분 동안 이야기를 경청하더군요. 그런 그의 태도에 주변의 시선도 자연스레 탈북민에게 집중됐고요. 새삼 진짜 군주와 독재 군주의 차이가 무엇인지, 북한과 비교하면서 생각하게 됐죠.”
찰스 3세가 이날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주제는 탈북민 인권 문제. 현지 한인들이 준비한 한식 체험과 전시, 공연 감상 등을 하다가 ‘가족이 어디 있느냐’, ‘어떻게 탈출했느냐’는 등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 탈북민이 “아직 가족들은 북한에 남아 있고,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답하자 찰스 3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관심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이정희 재영탈북민총연합회 회장이 “최근 중국이 탈북민을 북송하고 있는데, 영국 정부가 관심을 가지고 힘을 써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하자 찰스 3세가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현재 영국에는 700여 명의 탈북 동포와 가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뉴몰든에 거주 중인 한인 2만여 명 중 500여 명이 탈북민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대 초·중반 영국이 탈북민의 영국 망명에 관대한 정책을 펼치면서 탈북 동포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했다.
조 사무국장은 “찰스 3세의 한인타운 방문에 이어 지난해 11월 22일 리시 수낙 영국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을 맞이해 국빈 만찬을 개최한 일이 있었다”며 “이러한 일련의 이벤트 영향으로 영국 의회에서는 탈북민 인권 문제가 APPG NK를 통해 꾸준히 다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APPG NK는 2014년 데이비드 올턴 상원의원(APPG NK 공동의장)이 창립한 북한 관련 의원 모임이다. 올해 1월 기준으로 공식 멤버 수는 20명. 조 사무국장은 “하원 650명, 상원 780여 명인 영국 의회에서 이 모임을 모르는 정치인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영국 정치인과 청년층, 한인사회, 민주평통 영국협의회 등과 연대해 탈북민 북송 문제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할 생각이다. 이들의 제3국행을 위해 한국과 영국 정부가 함께 노력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취지에서다.
“아, 이게 바로 민주주의구나”
조 사무국장의 영국 생활 시작점은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영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뒤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모은 돈으로 영국 샐퍼드대와 리버풀대에서 국제정치학 학사, 석사를 마쳤다. 2016년에는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러한 기반을 토대로 그는 영국 국회 인턴, 하원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영국 지방선거에 세 차례 도전했다가 연거푸 패배의 쓴맛을 봤다. 조 사무국장은 2021년 5월 영국 지방선거에서 영국 맨체스터주 덴턴(Denton)의 남부 지역 구의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다. 인구 3만6000여 명이 거주하는 덴턴은 ‘당나귀 귀에 노동당 마크를 달면 당나귀가 당선된다’는 우스개가 있을 만큼 노동당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보수당 마크를 달고 출마해 낙선했지만, 선거를 치를 때마다 득표수가 점점 높아지고 있어 지역 내 떠오르는 정치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조 사무국장은 영국 정치를 몸으로 배우며 얻은 꿈과 용기, 희망으로 북한 사람들 또한 민주주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는 확신을 얻게 됐다.
“영국 정치는 북한에서 봤던 정치와 무척 달랐어요. 직접 선거 캠페인에 뛰어들며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고무됐죠. ‘아, 이게 바로 민주주의구나. 시민사회란 것은 이런 거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거에 또 출마할 거냐”는 질문에 그는 “또다시 낙선하더라도 앞으로 계속 도전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글·김건희 기자 사 진· 조 영 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