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762021.06

ⓒ청와대 / 국군 / 연합

특집

민주, 평화 그리고 통일

민주, 평화, 통일의 현재와
우리의 길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민주, 평화, 통일의 가치와 역할을 살펴보고 이러한 가치들을 어떻게 진전시켜 나가야 할지 그 길을 모색한다.



  한반도 분단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1민족, 2국가 상태만 장기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평화상태가 아닌 정전상태도 그대로이고, 휴전선에 백만이 넘는 군대가 팽팽하게 대치하다가 갑자기 전쟁 위기가 치솟는 상황도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또한 남북한 사이의 교류와 접촉도 일상화·제도화되지 못하고 이벤트처럼 진행되는 형편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장기간 지속된 분단은 애초에 분단이 야기한 문제를 변형시키기도 하고, 새로운 문제를 형성하기도 한다. 현시점에서 분단 문제의 해결은 해방 직후에 완수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 즉 1민족 1국가 상태를 달성하는 것으로 단순화하기는 어렵다. 분단이 지속되면서, 또 분단극복을 위한 시도가 거듭 실패하면서 누적되거나 새로 형성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분단 문제의 해결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통일, 민주, 평화라는 단어 자체가 시간 속에서 항상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시대에 따라 또 그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정치·사회집단의 입장 차이에 따라 글자는 같지만 실질적으로 내포하는 의미는 현저히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 평화, 통일의 현재와 미래를 명료하게 가늠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전반적인 맥락 속에서 특정 사안에 접근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민주와 통일
  분단 이후 한동안 한반도에서 분단 문제를 해결한다고 했을 때 이는 당연히 남북한의 통일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분단이 장기지속되면서 분단 상황 자체가 구조화·체제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분단은 남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현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여러 문제를 발생시키는 변수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구조화, 체제화된 분단 현실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분단 문제 해결은 남북한의 형식적, 영토적 통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단이 야기한 문제점, 즉 분단구조 또는 분단체제를 변혁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본다.

  분단 상황이 남북한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규정하는 구조 또는 체제로 작용한다는 사고 자체는 이미 1970년대 초부터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장준하 의원은 1972년 「민족주의자의 길」이라는 글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세계사적 모순’이 발현된 것으로 보고, 외세가 한반도를 분단시켰지만, 이는 또한 남북의 ‘신생권력층’이 분단을 권력장악에 활용한 결과라고 하면서 ‘내외가 상응한’ ‘분단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행기에 접어들자, 백낙청 교수는 본격적으로 분단체제론을 주장하여 체제화된 분단이 한국의 정치, 경제 및 일상생활에까지 규정력을 행사한다고 강조하면서, 민주화를 통해 추구할 개혁과 분단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서로 연결시켜 사고할 것을 주장하였다.

  분단과 사회개혁 문제를 연결하는 핵심 고리는 역시 민주화였다. 민주화로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고, 필요한 정치, 사회, 경제적 개혁을 달성하고, 구조화된 분단 문제를 극복한다는 사고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이에 내부적으로는 민주와 통일의 관계에 대해 ‘선 민주 후 통일론’, ‘선 통일 후 민주론’ 등의 논쟁이 진행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이 논쟁을 “민주와 통일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라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백낙청 교수는 선 민주 후 통일론자가 이야기하는 ‘민주’가 대체로 자유민주주의, 또는 정치적 민주화에 한정된 것인데 반하여, 선 통일 후 민주론자들이 주장하는 ‘민주’는 좀 더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까지도 수반하는 민주화임을 지적하였다. 이에 민주화의 과업을 분단극복 전에 할 수 있는 수준과 그 이후에 진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누어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한반도의 독재권력은 분단 상황을 활용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이른바 적대적 공모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과 분단 상황을 유지해 왔다. 바로 이 점이 민주화와 통일 과업이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중요 지점이었다. 그러나 남한의 민주화가 진척되어 이러한 문제들은 점차 약화되는 추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은 여전히 한국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남한은 민주화 이행에 접어들었지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민주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반공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정치지형은 다양한 이념을 반영하지 못하고, 보수적 이념을 갖는 정치집단 일변도로 협소하게 형성되었다. 이에 최장집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정치가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대립과 경쟁,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민주화 차원을 넘어 좀 더 높은 수준으로 질적 발전을 해나가야 할 때 분단 상황이 조성한 반공주의가 맹목적으로 압도하는 현실, 극단적인 이분법적인 사고 등은 계속해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면에서 한반도에서 민주화와 분단극복은 여전히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통일교육원, 『2021 통일문제이해』, p.153

평화와 통일
  분단 초기에는 평화와 통일의 과제가 분리되지 않았다. 분단 상태를 극복하고 남북통일을 달성하는 것이 폭력적 갈등의 소지를 없애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분단이 장기화되고, 1970년대 데탕트 시기를 거쳐 간헐적으로나마 남북대화가 진행되면서 평화 정착을 도모하는 단계와 통일을 추구하는 단계가 점차 구분되어 갔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의 관계는 평화 정착을 통해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논리로 완전히 분리되기보다는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에도 한반도에는 북한 핵 위기가 장기화되고, 평화 정착을 위한 아무런 질적인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통일 문제는 접어두거나 보류하고 남북한의 평화공존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역사적 사례로 보아도 현실적으로 강한 측이 약한 쪽을 병합하거나, 흡수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양자 사이에 갈등과 의구심, 적대감을 조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평화와 통일의 문제를 분리하여 남북한 평화공존, 또는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실질적으로나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양국체제(兩國體制)를 추구하자는 주장이 나타났다. 평화와 통일의 문제를 이처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통일을 보류하기 때문에 문제라기보다는 평화의 질적인 수준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더 문제라 할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겪은 이후 평화에 대한 사상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지적했듯이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거나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 경제 구조에 스며 있는 구조적 폭력, 이러한 폭력들을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합리화하는 문화적 폭력도 문제이다. 남북한은 각자의 여건과 논리를 따라 나름대로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이렇듯 분단 상황 하에서, 특히 군사주의 같은 것이 압도하는 조건 하에서의 발전은 억압과 착취를 양산하는 구조적 폭력을 그 사회와 경제체제에 각인시켰다. 따라서 분단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현상을 유지하면서 달성되는 평화는 이와 같은 구조적·문화적 폭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018년 8월 15일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수립 70주년 경축식. 평화가 각 국가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상호 연결성 인정하는 입체적 시각 필요
  통상적으로 통일이라 불렸던 분단 문제의 해결, 민주와 평화의 과업은 그 내부의 질적 수준 문제까지 생각한다면 여전히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분단 문제의 해결은 민주화와 평화에 기여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수준을 질적으로 높이는 데 여전히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분단 문제 해결과 민주와 평화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잘 연결시켜 해결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단 상황 속에서 반공주의, 반제국주의 등 어디에 반대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경향, 민주화와 산업화를 완전히 분리하여 선후관계로 정립하는 등의 이분법적인 시각,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타자화함으로써 자기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습속 등이 이러한 작업들을 여전히 방해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 좀 더 주의하고 분단과 민주, 평화의 관계에 대해 포괄적이면서도 다변적인 대응을 해 나갈 수 있다면, 확실히 분단 문제의 해결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정착시키고 그 질을 높여가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홍석률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