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762021.06

국제

글로벌 보건 위기 속,
협력과 민족주의 사이의 백신



백신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경쟁과 백신 민족주의가 첨예하게 진행되는 양상을 분석하고, 기술 협력을 통한 팬데믹 시대의 새로운 지역 공동체 구상을 살펴본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준 재앙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2021년 5월 기준, 1억 6,300여 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는 340만 명에 육박한다. 이는 부산시 규모의 인구가 불과 1년 반 만에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희생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팬데믹의 기록은 그것만이 아니다. 보통 백신 개발에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백신은 개발되는 데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도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팬데믹의 상반된 기록 속에서 지구의 한 쪽에서는 희망을 노래하게 되었으나 다른 한쪽의 주민들은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백신 개발 장벽 뛰어넘은 코로나19 팬데믹
  어려운 일을 겪을 때 ‘홍역을 치른다’라고 할 만큼 홍역은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 온 감염병이다. 하지만 1960년대 초 홍역 백신이 개발됨으로써 오늘날 홍역을 앓는 사람은 크게 줄었다. 홍역 백신은 연구가 시작되어 출시되기까지 10년 정도 걸렸는데, 백신 개발에서 10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뇌수막염 백신은 19세기 말에 처음 연구가 시작되어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980년대에 최초의 백신이 출시되었다.

  백신 개발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제약 기술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우며,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임상시험을 거치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빅파마(Big Pharma)라 불리는 선진국의 대형 제약회사나 연구기관이 아니면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기술력이 높은 대형 제약회사라고 할지라도 시장성이 크지 않으면 약품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백신 개발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제약기술, 자본, 시장성 등 진입장벽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그러한 장벽을 일거에 뛰어넘은 드문 사례이다. 워낙 많은 감염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질병 정보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첨단기술의 발달로 염기서열 분석과 같은 복잡한 연구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의 워프 스피드(Warp Speed)정책*이나 WHO 주도의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 세계에 코로나19 백신을 평등하게 공급하기 위해 설립된 세계 백신 공동 분배 프로젝트)와 같이 주요 국가 및 국제기구가 앞장서서 백신 개발을 위해 많은 자본을 제약회사에 투자하여 사전구매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백신 개발의 가장 큰 걸림돌인 시장성 문제가 해소되었다.


*워프 스피드(Warp Speed)정책
미국 정부의 신속한 코로나19 백신 개발, 배포, 접종 사업. 코로나19 백신 개발 기간을 8개월로 단축해 2021년 1월까지 3억 명 분량의 백신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됐다.

주요 국가들은 자국의 제약기술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백신 개발 경쟁에 나섰다. 2020년 8월 러시아가 스푸트니크 V 백신을 개발했다고 선언한 이후 미국, 중국 등에서 백신이 출시되었다. 일부 백신은 임상실험 자료가 검증되지 않아 안전성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으나 2021년 말까지 선진국에서는 백신 접종이 대부분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5월 5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활동가들이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국제적 접근권 확대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

백신 민족주의와 백신 공급의 빈익빈 부익부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대혼란이 본격화되던 2020년 4월 WHO, EU 집행위원회, 게이츠 재단 등은 코로나19 백신을 신속히 개발하여 보급하기 위한 다자간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WHO, 감염병대응혁신연합(CEPI), 글로벌백신연합(GAVI) 등 글로벌 보건기관들과 여러 나라들은 코백스를 구성했다. 이는 백신의 공동구매 프로그램으로서, 각국으로부터 기금을 모금하여 옥스퍼드 대학과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에 백신 개발을 의뢰하고 2021년 말까지 세계 인구의 20%에 대한 접종을 통해 팬데믹의 기세를 꺾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다자간 연대는 백신 개발의 속도를 높이고 저렴한 가격으로 백신을 공급하여 글로벌 보건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미국 정부는 자국의 화이자와 모더나가 개발한 백신을 자국민 접종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스라엘과 같이 선제적으로 백신을 구매한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백신 공급은 지체되었다. 또한 코백스를 통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도 사용승인과 원료 공급이 늦어지면서 예상보다 더디게 공급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변이 바이러스가 만들어지고 인도 등 저소득 국가에서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인도 정부가 세계 최대 규모의 백신위탁생산시설인 인도세럼연구소(SII)에서 생산되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수출을 금지하고 자국민에게 전량을 우선공급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백신 공급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초래되었다.

현실적인 대안은 백신 제조 능력과 설비를 갖춘
나라에 대해 제조기술을 이전하여
더 많은 백신을 위탁 생산하는 한편, 국제적인
합의를 통해 생산된 백신을 어떻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대안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은
백신 개발과 공급의 핵심 행위자가 될 수 있다.


  2021년 5월 15일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14억 5,000회 분량의 백신투여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세계 인구 100명당 평균 19회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하지만 부국과 빈국 사이에 큰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100명당 116회 투여를 달성했고, 영국은 84회, 미국은 82회, EU는 44회 투여를 이루었다. 반면 사태가 매우 심각한 인도는 100명당 13회, 브라질은 25회이고, 대부분의 아프리카 저소득 국가들은 1.7회에 불과하다.

  저소득 국가 대부분이 백신 공급에 목매달고 있는데, 자국민 접종에 필요한 수량보다 서너 배 많은 백신을 사전 구매한 미국 등 부유한 국가들은 마스크를 벗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있다. 백신의 수급 불균형이 쉽게 해소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백신이 여유 있는 나라들이 부족한 나라에 백신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등 여유 있는 나라들은 부스터 샷(추가 접종)과 청소년 접종 확대를 이유로 백신 제공을 꺼리고 있다. 다시 말해 다른 나라의 희생은 외면하고 자국에만 백신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글로벌 보건과 미국의 백신외교
  글로벌 보건은 공공재에 가까운 개념이다. 글로벌 네트워크 시대에 사람들 사이의 접촉은 불가피하다. 다른 사람들이 감염병으로 신음하는데 나 혼자서만 건강할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에 가깝다. 더욱이 질병으로 세계 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도 혼자서 번영을 지속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백신의 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백신 제조회사를 가지고 있는 제약 선진국의 양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20년 10월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저소득 국가의 제약회사가 백신 기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 백신 생산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백신 제조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일시적으로 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 4월에는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수상,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 조셉 스티글리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등 175명의 국제 저명인사들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백신 제조 기술 특허의 일시적 면제를 요청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고, 버니 샌더스 등 미국 정치인들도 여기에 동조했다.

  이에 대해 빅파마들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제조 비밀을 공개하면 수익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지식재산권 보호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선례가 만들어져 앞으로 새로운 의약품을 연구하고 제조하는 동기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행히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백신 기술 특허를 일시적으로 면제하는 제안을 원칙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미국은 백신외교를 통해 국제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다시 글로벌 보건안보의 리더십을 회복하겠다는 전략을 추진하고자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특허 면제를 강하게 반대하던 EU와 영국도 “제안을 평가해 보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5월 13일 서울 동대문구 체육관에 마련된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에서 백신 접종 후 이상반응을 모니터링하는 어르신들 ⓒ연합

백신 개발·보급 위한 국제협력과 한국의 역할
  설령 백신 제조 기술이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백신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전문가와 첨단 시설이 갖춰져야만 안전한 백신을 만들 수 있다. 코로나19 백신의 원천기술을 가진 국가를 제외하고 그런 전문성과 설비를 갖춘 나라는 한국, 인도, 브라질 등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실적인 대안은 백신 제조 능력과 설비를 갖춘 나라에 제조기술을 이전하여 더 많은 백신을 위탁생산하는 한편, 국제적인 합의를 통해 생산된 백신을 어떻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대안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은 백신 개발과 공급의 핵심 행위자가 될 수 있다. 세계적인 백신연구기관인 국제백신연구소(IVI)가 서울에 있고, WHO 사무총장이었던 故 이종욱 박사는 ‘백신의 황제(Vaccine Tsar)’라고 불릴 만큼 한국은 백신사업의 선두주자이다. 또한 한국의 바이오기업들은 이미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위탁생산하고 있고, 모더나 백신의 생산 계약도 이루어질 전망이다.

  백신의 개발과 보급으로 머지않아 코로나19 팬데믹은 종식될 것이다. 하지만 감염병 위기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한국은 지금까지 방역에 비교적 성공하였으나, 백신 개발에서는 선진국에 뒤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늦은 것은 아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은 방역 모범국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백신의 개발과 공급을 위한 글로벌 협력의 핵심 행위자로서 위상을 구축해야 한다. 또한 고부가가치 산업인 바이오제약 산업을 보다 발전시켜 미래 한국의 성장 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더 많은 연구와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현실적인 대안은 백신 제조 능력과 설비를 갖춘 나라에 대해 제조기술을 이전하여 더 많은 백신을 위탁 생산하는 한편, 국제적인 합의를 통해 생산된 백신을 어떻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대안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은 백신 개발과 공급의 핵심 행위자가 될 수 있다.

조한승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